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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은말고이응 Mar 16. 2016

인정과 '그리운 우체국'

말씀 언, 칼 도, 마음 심

3개월전 약 4년을 알던 사람과 다시 못 보게 됐다. 사귀다 헤어지게 된 것이다. 몇 주간 이 일로 주변 사람들을 부단히 귀찮게 했다. 호들갑스러운 나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좋은 글귀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러나 가장 도움이 된 것은 한 지인의 투박한 말이었다. “이제 인정해라.”


‘인정’은 매우 익숙한 단어다. ‘먹다’와 같이 말이다. 그러나 ‘먹는’ 행위는 밥 ‘먹듯’할 수 있는 데 반해 ‘인정’해야 한단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힘들다. 아무나 붙잡고 자신의 억울함을 말하고 싶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결과를 뒤바꿀 수 있는지 다양한 수식으로 확률을 계산하기도 한다. 그러고도 셈이 안 서면 누군가 혹은 상황을 향한 일방적인 불평과 비난만이 짙게 남는다. 나아지지는 않고 점점 매몰되어 가는 것이다.


나 또한 상대에게 날카로운 말들을 쏟아내고 싶었다. 문장을 칼처럼 갈았다. 그러나 문득 돌아봤을 때 칼을 꽂을 곳은 그 곳이 아니라 나임을 알았다. 끝이라는 단어로 내 감정을 도려내면 다 끝날 일이었다. 인정의 인(認)은 말씀 언, 칼 도, 마음 심으로 이뤄졌다. 칼 같은 말로써 스스로 마음을 모질게 먹는 것, 그것이 상황을 새 국면으로 접어들게 할 유일한 길 ‘인정’이다.


인(認)의 능선을 넘는 것은 외롭다. 자신의 인생에서 벌어진 일들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자신만의 몫이기 때문이다. 22살 때 류근의 ‘그리운 우체국’을 읽으며 왜 그가 할 말을 담은 엽서를 결국 부치지 못했는지 의아했었다. 시인이 ‘인정은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알았기에 그랬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생각해본다.


옛사랑 여기서 얼마나 먼지

술에 취하면 나는 문득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선량한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우표 한 장 붙여주고 싶으다

(중략)

차마 입술을 떠나지 못한 이름 하나 눈물겨워서

술에 취하면 나는 다시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거기 서럽지 않은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사소하게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안부 한 잎 부쳐주고 싶으다


‘엽서 한 장 쓰고 싶다’, 그러나 하지 않는다. ‘안부 한 잎 부치고 싶다’, 그러나 하지 않는다. 대신 ‘하지 않아야 함’을 계속 말하며 스스로의 마음을 베어나가는 것. 류근 식의 인정이다. 능선을 어떻게 탔는진 모르겠지만 곧 이 상황을 밥 ‘먹듯’ ‘인정’할 수 있겠다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나는 거의 빠져나온 듯 하다. 시를 쓴 류근은 어떨까. 그 또한 그러기를 빈다. 이토록 깊은 협곡을 지난 걸 보 그가 더이상 리운 우체에 닿지 않을 것이라, 조심스레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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