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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은말고이응 Feb 13. 2017

가짜 짝사랑

호모 센티멘탈리스

연애에 대한 궁금증이 불타는 20대 초 솔로 시기. 나를 가장 당황스럽게 했던 것은 공백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드라마, 영화 혹은 음악 같은 데서 볼 법한 강렬한 연애 감정들이 생겨나지 않았다. 이런 공백의 상태는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 무렵 또래 친구들과 함께한 술자리에서 짝사랑이라도 하고 싶다고 했더니 그 자리의 75%가 동의했었다.     


공백의 상태에서 내가 찾은 해결책은 단순했다. 이렇게 내 20대 초반이 흘러가는 것이 안타깝고 아쉬우니 당장 연애는 못할지라도 일단 짝사랑부터 해보자는 것이었다. 나도 짝사랑에 가슴 아파하는 갖가지 문화 콘텐츠들을 소비하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대충 ‘스펙 좋고’ ‘반반한’(물론 그 당시에는 스스로가 이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골랐다.     


물론 그런 저열한 해결책이 통할 리가 없었다. 짝사랑은 그 사람을 생각 만해도 가슴 아프고 힘들다던데 난 노력해도 아프지 않았다. 공백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때 느꼈던 공백은 사실 인간 본원의 고독감, 허무함처럼 거대한 무언가가 아니었다. 그냥 나만 동떨어진 것 같은 불안감이었다. 많은 친구들이 미니홈피를 도배하며 즐겁게 연애하고 있었다.     


최근 한국일보의 칼럼을 읽다가 ‘호모 센티멘탈리스’라는 개념을 알게 됐다. (밀란 쿤데라의 ‘불멸’에 등장한 개념이다.) ‘호모 센티멘탈리스’는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을 ‘가치로 정립’한 사람이라고 한다. 감정이 하나의 가치로 간주되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느끼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감정은 감정이 아니라 ‘모방’, ‘과시’가 된다.     


20대 초반 짝사랑의 대상을 찾았던 그 시기, 나는 분명 ‘호모 센티멘탈리스’라는 종족이었다. 세상은 20대 초반 첫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온 힘을 다해 떠들고 있었고 나 또한 그런 감정을 ‘갖고’ 싶었다. 가치 있어 보여 ‘모방’을 시도했다. 그러나 가짜 짝사랑의 대상들은 죄다 뇌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사라진다는 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였다.     


밀란 쿤데라는 ‘불멸’에서 진짜 감정은 우리의 육체를 거역하며 솟아오르는 것이라고 했다. ‘밀란 쿤데라식’ 진짜 감정은 위대한 것이다. 아픈 몸을 이끌고 누군가의 집 앞에 쫓아가게 만들며, 중요한 약속 전날 슬픔을 참지 못해 눈을 퉁퉁 붓게도 만드니까 말이다. 그런데 나와 세상의 경계가 없는 이 관계망 속에서 내 진짜 감정이 무엇인지 희미해지고야 말았다.


20대 후반이 된 지금, 나는 스스로가 '가짜 짝사랑'을 하는 강렬한 감정의 '호모 센티멘탈리스'는 탈피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상사의 피드백 앞에서 '쿨한', 실패한 연애 앞에서 '익숙한', 나를 놀라게 하는 사건들 앞에서 '담담한', 이 차가운 감정들이 나의 것인지 궁금하다. 27살의 성인은 조금 차갑고 자기 감정 관리에 능숙한 존재여야 인정 받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은 아닐까.


'호모 센티멘탈리스'에서 벗어난 것일까 혹은 다른 형태로 진화했을 뿐일까. 가끔 속에서 어디든 달려나가고 싶게 만드는 감정들이 밀려오는 것을 보면 후자가 조금 더 가까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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