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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은말고이응 Jan 17. 2018

‘무쓸모’ 선물

서로에게 쓸모없는 선물을 하는 연말 이벤트가 웹에서 화제였다. 나도 한 번 해보고 싶어서 이번 연말 모임에 친구들에게 각자 만원 미만으로 쓸모없는 선물을 사오자고 했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은 각도기와 전동 지우개 등을 사왔고 나는 또봇 쌍안경을 사갔다. 무슨 불이 번쩍번쩍 나오는 경광봉을 사온 사람도 있었다. 


정말 쓸모없었다. 이 나이 먹고 각도를 잴 일이 뭐가 있으며(퇴사각은 각도기가 아닌 마음으로 재는 것) 삭막한 이 도시에 쌍안경으로 가까이 봐서 좋을 건 또 뭐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쌍안경으로 바라본 친구의 얼굴은 생각보다 더 못생겼었다. 그래도 기가 찬 선물들 덕분에 손꼽히게 재미있는 밤을 만들 수 있었다.    


받자마자 버릴 각

‘사이드 프로젝트’라는 개념이 있다. 회사에서 본업이 아닌 다른 프로젝트를 하는 것을 일컫는 말인데, 이로써 새로운 영감이나 창의력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사이드 프로젝트는 본업처럼 성과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쓸모가 좀 없어도, 좀 심하게는 ‘무쓸모’라도 본업에 새로운 원동력을 불어넣는다면, 사이드 프로젝트를 해도 된다.     

그래도 점심시간엔 밥 먹어야죠

‘사이드 프로젝트’가 커리어 개발에 좋은 영향을 주는 것처럼 ‘무쓸모’의 시간은 정신 건강에 참 좋은 영향을 준다. 첫째, 쓸모를 따지는 사고회로를 잠시 쉴 수 있다. 계산을 멈출 수 있는 것이다. ‘이 가격에 이 물건’, ‘이 시간에 이 사람’ 등 쓸모를 따지는 선택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다. 둘째, 몰입해서 즐길 수 있다. 계산이 사라지면 남는 것은 내가 이 ‘무쓸모’ 행위를 좋아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뿐이다. 만약 내가 좋아한다면, 게다가 쓸모는 안 따지기로 했다면 신나게 즐기면 그만인 것이다. 셋째, 생각보다는 쓸모 있는 경우가 많아 뿌듯하다. 처음엔 무조건 ‘무쓸모’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니 꽤 괜찮은 시간이었던 것이다. 쓸모없는 선물하기로 내가 글의 글감을 얻은 것처럼 말이다.     


고작 20년만에 광화문 교보빌딩의 현판의 기조가 확 바뀌었다. 국가 경제를 부흥하자던, 국민의 쓸모를 명확히 찾는 1997년의 글귀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는 2017년의 글귀로 변했다. 2017년의 글귀는 지금 당장은 '무쓸모'라도 길게 보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미겠다. 

1997년 겨울
2017년 겨울


20년의 광화문 글판이 전하는 지혜를 귀담아 나 또한 올해는 나에게 '무쓸모'를 많이 선물해주려 한다. 쓸모없는 선물하기가 친구들과 손꼽히게 재미있는 밤을 만든 것처럼, 나와 함께하는 '무쓸모' 시간 또한 손꼽히게 재미있는 한 해를 만들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어쩌면 그 와중에 인생의 정말 제대로된 '쓸모'를 찾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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