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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은말고이응 Jan 26. 2018

불평등조약

손윗사람과 손아랫사람의 예의

회사를 다니면서 또래가 아닌 연장자들과 지낼 일이 전보다 많아졌다. 이들과 대화하면서 기성세대들도 젊은 세대를 그리 편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팀장님들이 사원, 대리급에게 지켜야하는 예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심심찮게 말을 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요새 애들한테는 저녁에 밥 먹고 가자고 하면 안 돼. 예의에 어긋난다고.” “어린 여자 사원들한테 남자친구 있는지 물으면 안 돼.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

손아랫사람에 대한 예의 규범은 보통 ‘하지 않기’로 끝난다. 곤란한 질문이나 요청 혹은 핀잔 등을 주지 않아야 꼰대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최근, 왜 연장자의 예의는 ‘하지 않기’로 끝나는 것인지 의문스러워졌다. 여느 때처럼 외주사와 함께 밥을 먹는데, 어린 PD가 허겁지겁 서랍을 열고 숟가락을 놓을 휴지를 깔고 있었다. 선임 PD에게 예의는 ‘숟가락 안 깔아도 혼내지 않기’였고, 어린 PD의 예의는 ‘숟가락 깔기’였다.

생각해보니 ‘하지 않기’로 끝나는 손윗사람用 예의와 반대로, 신입사원을 거쳐 온 내가 배운 손아랫사람用 예의의 대부분은 ‘하기’로 끝나는 것들이었다. 상사에게 경제적 여건이나 신상에 관한 곤란한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고, ‘좋은 식당을 예약하기’, ‘식당에서 가장 안 좋은 자리에 앉기’, ‘카톡을 받지 않으시면 전화하기’가 되어야 센스와 예의를 탑재한 사원이 될 수 있었다. ‘하지 않기’와 ‘하기’, 분명 예의의 강제력이 달라보였다.

법적인 규제 방식에는 2가지가 있다. ‘포지티브 규제’와 ‘네거티브 규제’다. ‘포지티브 규제’는 해야 할 것만 강제하고 나머지는 다 금지하는 규제이다. 만약 ‘포지티브 규제’ 형식으로 쌀, 소고기는 수입하기로 했다면 이외에 나머지는 전부 수입할 수 없다. 반면 ‘네거티브 규제’는 하지 말아야할 것만 정하는 규제이다. 만약 ‘네거티브 규제’ 형식으로 돼지고기는 수입하지 않기로 했다면 쌀과 소고기를 포함한 나머지는 전부 자유롭게 수입할 수 있다.

당연히 강제하는 정도가 강력한 것은 ‘포지티브 규제’이다. 그렇기에 ‘포지티브 규제’에 묶인 금융업의 경우 ‘네거티브 규제’로 전환해 자유도를 줘야한다는 주장도 미디어에서 자주 들린다. 같은 규제의 논리를 적용해보면, 한국 기업 문화에서 혹은 더 크게는 위아래사람 간의 관계에서 ‘손윗사람’은 ‘손아랫사람’에 대해 훨씬 큰 자유를 지닌 예의 조약을 맺고 있었다. ‘불평등조약’이다. 진짜 수평적인 조직이 되려면 은연중에 내재화했던 이 논리부터 벗어나야 한다.

꼰대가 되지 않는 법에 대한 텍스트가 유난히 많이 보인다. 그와 동시에 아재개그 등 아재들에 대한 애정을 담은 짤들도 많이 보인다. 한국의 위계서열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되버린 '아재'들이 짠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런 시스템을 공고화하는 '꼰대'들이 싫은 것이다. 이 위계서열을 깨려면 사고의 전환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랫사람에게는 네거티브 규제형 예의만 지킨다고 해서 '센스 없다'고 비난하지 말아야하며, 반대로 윗사람은 포지티브형 예의를 종종 지키는 센스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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