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hining days Mar 06. 2023

아빠의 장례식

유쾌한 장례식

그렇게 빨리 가시게 될 줄은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딱 적당한 타이밍이었다.


왕래가 끊겼던 친척들까지 모두 만난 후였고, 아빠의 발을 절단하기 전이었다. 만약 수술을 했다면 낯선 의료진들 사이에서 의식도 없는 상태로 마지막을 맞이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빠는 자신의 몸을 온전히 지킬 수 있었고, 우리는 아빠를 따뜻하게 배웅할 수 있었다.


이젠 다 끝났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아빠는 드디어  고통을 끝내고 그토록 원하던 평안에 이르렀고, 살아남은 가족들 또한 그랬다. 아빠를 다시 볼 수 없는 건 슬프고 아쉬웠지만 지금의 이별이 끝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우리는 서로의 어깨를 토닥였다.


내가 울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속상해하실 까봐 덤덤하게 있으려 애썼는데, 누군가가 내 손을 잡고 축복해주자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엄마도, 아빠도 없는 나의 남은 날들이 이젠 평안해지길 바란다는 말에, 참으려 할수록 끄윽끄윽 소리는 더 커졌고, 한번 터져 나온 울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 기도가 과거의 고통과 슬픔, 내일에 대한 두려움까지 모두 시원하게 씻겨주는 것 같았다.




평일 낮이라 조문객들이 별로 없었다. 우리는 커피가 든 종이컵을 하나씩 들고 묵은 이야기를 나눴다. 고모들은 앞다투어 그동안 힘들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막내고모가 말했다.


"옛날에 둘째 언니는 1층에 살고 나는 그 집 4층에 살았었는데, 오빠(우리 아빠)는 내가 거기 사는 줄 몰랐어. 일부러 이사 간 거 말 안 했거든. 근데 밖에서 오빠가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거야. 언니 보고 나오라고 하면서 막 탕탕탕탕 현관문을 두드려. 그때 내가 집에서 애 보면서 얼마나 조마조마하게 숨어있었는 줄 아니?"


고모들은 지나간 상처를 훈장처럼 여기며 웃음꽃을 피웠다. 모든 게 다는 해방감이 우리를 웃게 했다. 스꽝스럽게 표현하는 고모들의 화려한 말발에, 여기가 장례식장이 맞나 싶을 정도로 너무 큰소리로 웃어버렸다. 우리는 옆 호실 눈치를 보며 황급히 입을 가렸다.


"아휴, 조용히 좀 해. 장례식장에서 그렇게 웃으면 어떡해."


그러다 문득 친척언니가 아빠의 드물었던 호시절에 대해 이야기했다.


"난 옛날에 삼촌이 그림 그린 거 보고 놀랬었잖아. 사진 찍은 건 줄 알았는데 직접 그린 거라고 해서. 그때만해도 삼촌 참 잘생겼었는데."


"네 아빠가 어릴 때 엄청 예쁘게 생겨서 동네 사람들이 혼혈이냐고 물었었어. 술만 마시면 맨날 싸워서 이도 부러지고 얼굴 다 망가졌잖아. 술 때문에 인물 다 죽었지. 원래 영화배우 하고 싶어 했는데 딴따라는 절대 안된다고 할아버지가 반대해서 못했지. 그때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할걸 그랬나 봐. 그러면 좀 더 행복하게 살았으려나?"


아빠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게 신기했다. 아빠 칭찬은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아빠에 대한 좋은 얘길 들어보니 내심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친척들 앞에서의 나는 늘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았는데, 이젠 편하게 웃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그들과 동등해진 기분이 들었다. 아빠의 장례식은 민폐 끼치는 아빠의 자식이 아닌, '정혜원'이란 개인으로 독립한 날이었다. 




밤이 늦었다. 옆 호실 불은 이미 다 꺼졌. 친척들은 집에 가서 씻고 아침 일찍 다시 나오기로 했다.


어릴 적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란 친구가 장례식장에서 자고 가겠다고 했다. 힘들 때마다 내 옆을 묵묵히 지켜주고, 나의 외로움을 알아주고, 때로는 모른 척도 해주고. 내뱉기 힘든 말을 속으로 삼켜도 내 마음을 다 알아주는 친구였다. 나비처럼 날아와, 형편없던 어린 시절의 나도 꽃처럼 귀하단 걸 깨닫게 해 준 소중한 친구.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 그 친구는 나의 가족이었다.


양치를 했다. 남몰래 흘렸던 눈물 자국도 폼클렌징으로 깨끗이 씻어냈다. 낯선 곳이라 잠이 안 올 것 같았지만 고단한 탓이었는지 생각보다 금방 잠에 들었다. 오늘 하루 많은 이들이 위로해준 덕분에, 새까만 장례식장에서의 밤은 외롭지 않았다. 오랜만에 옆구리 따뜻하게 단잠을 잤다.


그날밤 첫째 고모의 꿈속에 아빠가 찾아왔다. 끝없이 펼쳐진 노란 유채꽃밭 한가운데에서 아빠가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생전엔 볼 수 없었던 아빠의 편안한 미소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