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지루함과 우울감은 둘째를 낳고나서부터 시작됐다. 좋아하는 음식을 먹어본 지가, 우아하게 커피를 마셔본 적이 언제인가.. 대부분 아이들이 남긴 반찬을 허겁지겁 먹거나, 국에다 밥을 말아 한 끼를 뚝딱 해치우기 바쁘다. 나를 돋보이게 해줄 예쁜 옷 대신 아이가 토해도 괜찮은 싸구려 티셔츠만 입는다. 친구들을 만나고 싶은데 그럴 만한 시간이 없다. 어린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삶엔, 선택지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나랑 똑같이 아이 둘을 키우면서도 즐겁게 사는 사람을 마주쳤다. 빼앗긴 자유 때문에 내 삶이 지루한 게 아닌가? 그녀에겐 있고 나에겐 없는 건 도대체 뭐야?
첫째를 낳고 처음 해보는 부모 노릇은 새롭고 신기한 일 천지였다. 분유와 기저귀는 어떤 브랜드를 살 지, 아기 옷은 몇 사이즈인지, 이유식을 만들려면 뭐가 필요한지 엄마로서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고 서툰 나는 허둥지둥 바빴다.
아기가 처음 눈을 맞출 때, 아이의 표정 하나, 손짓 하나가 소중하고 신기했다. 또 아기는 어찌나 빨리 크는지 기어다니다가 금세 벽을 잡고 일어섰고, 내 도움 없이도 혼자 걷기 시작했다. 날마다 처음 보는 아이의 모습에 일상은 즐거움으로 가득했고,아이가 커가는 걸 지켜볼 수 있다는 건 신이 내게 준 축복 같았다. 엄마 역할에 매료되어 대단한 사람이 된 것, 마냥 힘든 일도 힘든 줄 모르고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교육행정직 공무원이 4시 40분에 퇴근한다는 걸 우연히 들었다. 아기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 9년 만에 다시 공무원 시험공부를 시작했다.낮에는 6개월 된 아기를 먹이고 씻기면서 바쁘게 엄마 노릇을 하고, 밤이 되면 아기를 재운 뒤 숨 돌릴 틈도 없이 곧바로 책을 펼쳤다. 주말엔 남편이 아기를 봐준 덕분에 집 앞 도서관에 가서 하루 종일 공부할 수 있었다.
매일 5시간 밖에 못 자는 강행군을 지나, 다행히 5개월 만에 합격했다. 드디어 힘들었던 수험생활이 끝났구나! 그리고 2주일 뒤에 떠난 가족 여행에서.. 나는 둘째를 임신하게 되었다.
이제 좀 쉬려나 했는데 둘째가 이렇게 빨리 생길 줄이야
고생 끝에 낙이 올 줄 알았건만 아직 못다 한 고생이 남았었나 보다.첫째 때도 주변에서 유별나다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입덧이 심했는데 둘째 때는 더 가혹했다. 첫째, 둘째 모두 임신 기간 내내 입덧을 했고 출산하는 날에도 산부인과에서 두 번이나 토하고 나서야 아이를 품에 안았으니까.
로션, 샴푸, 치약 냄새 같은 것들이 역하게 느껴졌다. 화장실을 들어가는 게 고역이라 도무지 씻을 수가 없다. 칫솔을 입안에 넣는 것만으로도 구토가 나와서 양치하는 게 제일 괴로웠다. 샤워를 할 때는 물 냄새 때문에 침을 삼키면 토할 것 같았다. 왕년에 놀던 언니(?)마냥, 샤워하는 내내 '퉤퉤'하고 침을 계속 뱉어댔다.
임산부용 소화제, 입덧 약, 입덧 밴드, 입덧 수액 등 아~무것도 소용이 없었다. 속이 울렁울렁 대서 음식이라곤 찬물에 만 밥과 김치가 고작이었다. 첫째를 낳고 난 뒤에 생긴 요실금까지 더해져서 토할 때마다 소변이 줄줄, 아니 쫙쫙 새어 나왔다. 구토와 요실금의 콤보 세트. 위아래로 쏟아내는 진풍경이구나~
그 날 하루에만 벌써 5번째 속옷과 바지를 갈아입다가, 옷장 앞에 주저앉아 "더 이상은 못 하겠어!"하고 엉엉 울어버렸다. 토하는 것도 너무 힘들지만 요실금이란 녀석은 여자라는 정체성에 너무나 큰 상처가 됐다. 남편은 그런 내가 안쓰러워서 요실금 기저귀를 사주겠다고 했지만 어떤 것도 나에게 위로가 되지 않았다! 아무 때나 바지에 실수를 하는 치매 할머니가 된 느낌이었다.
그 최악의 몸 상태로 공무원 연수원 합숙생활 2주를 보내고 발령까지 받았다. 바로 육아휴직을 하면 학교에 폐를 끼치게 되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출산 전 4개월 동안 출근을 했다. 처음 배우는 일들은 낯설기만 했고 하필이면 그때가 일 년 중에 가장 바쁜 시기였다.
둘째 임신 중에만 10번의 감기가 걸렸다. 그중 5번은 몸살이었다. 열이 40도 가까이 올라가도 함부로 약을 먹을 수가 없어서 열이 펄펄 나는 몸으로 운전대를 잡고 꽉 막힌 금요일 퇴근길을 지나 산부인과에 도착했다. 침대에 누워서 주사 바늘을 꽂고 나서야 눈을 감고 마음 편히 쉬었다. '내일은 주말이라 집에서 쉴 수 있구나.' 금요일에 아픈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퇴근길에 운전하다가 갑자기 토하기도 했다. 매일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던 비닐봉지를 꺼낼 틈도 없이 핸들이며, 계기판이며, 겨울 패딩까지 다 엉망이 되어버렸다.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입을 틀어막았던 손에도 토사물로 범벅이 됐다. 얼굴에도 축축한 그것이 덕지덕지 붙었다.
진동하는 냄새에 또 우웩! 안돼! 비상, 비상. 빨리 냄새를 피해야해! 추운 겨울에 창문을 활짝 열고 칼바람을 얼굴에 고스란히 맞았다. 그때 옆 차 운전자가 우연히 내 모습을 봤다면.. 정말 가관이었겠지.
그 뒤로 스스로 별명을 '토쟁이'라 지었다. 어떤 날은 잠을 자다가 밤중에 잠깐 나온 기침에 음식물까지 같이 토했다. 짝짝짝. 과연 '토쟁이'다워.
역류성 식도염 때문에 쉴 때도 침대에 눕지 못하고 앉아 있어야 했고, 치골통, 환도 선다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할 때도 있었다. 몸의 온도조절 능력도 고장이 난 건지. 새벽 3시가 넘도록 뒤척이다가 아직도 한 겨울 같던 3월에 찬물로 샤워를 하고 선풍기까지 틀고 나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사람들 앞에서 구토하게 될까 봐, 겨울 찬바람에 마중 나온 재채기에 소변도 같이 흘려버릴 까봐 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몸은 너덜너덜해지고 정신적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2주 만에 또 몸살에 걸려서 수액 맞는 중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죄책감으로 커져갔다. 뱃속에 동생이 생긴 뒤로 내 몸 하나도 간수하기 힘들어서 17개월 된 첫째를 서둘러 어린이집에 보내게 되었다. 종일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앉아있다가 고작 하는 말이라곤 "엄마 힘드니까 저리 가" 밖에 없었다. 낯선 엄마 모습에 불안해진 첫째는 그럴수록 더 안아달라고 보챘다. 이직도, 둘째 임신도 첫째와 더 행복해지고 싶어서 시작한 일인데 내 손으로 아이의 행복을 뺏은 것 같았다.
뱃속의 둘째에게도 예쁜 마음, 좋은 생각으로 태교는 못해 줄 망정, 일하느라 늘 긴장해있고 힘들어 죽겠다는 부정적인 말들만 해서 아이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첫째 때는 탄산음료, 밀가루 등 태아에게 안 좋다는 건 최대한 안 먹었는데 둘째 때는 '이러다 내가 죽겠다. 엄마 먼저 살고 보자'는 마음으로 콜라도 마시고 회도 먹고 매일 맥심 커피를 두 잔씩 마셨다. 먹으면서 마음이 영 불편한 게 문제였을 뿐.
누가 누가 불행한가 대회를 열면 나도 순위권에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고통을 신이 외면하듯, 하루는 너무 길었고 시간은 태평스럽게도 더디 갔다.나에게 더 이상 버틸 힘이 남아 있지 않은데 여전히 출산예정일은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리 있었다. 10 달이라는 시간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든 계절을 다 지내야 하는 건데 내 바람처럼 그렇게 금방 올 리가 없지.
이게 다 꿈이고 눈을 뜨면 모든 게 없던 일이 되었으면 좋겠어. 눈 뜨고 있는 모든 시간이 고통이야... 이제라도 시간이 빨리 지나가 주길 간절히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둘째를 낳았다! 드디어 그 지옥 같던 입덧이 끝났다. 그런데 입덧이 가고 산후풍이 왔다. 임신기간 동안 몸이 너무 약해진 탓인지 출산 후 산후풍이 심해서 바람이 두개골을 뚫고 들어와 뇌 속에 들어앉은 것 같이 머릿속이 시렸다. 8월 한 여름에 털모자를 쓰고 있어도 찬기운이 가시질 않았다. 100일이 넘도록 찬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에어컨 바람도 몸에 닿지 않게 조심했건만! 치아부터 시작해서 모든 뼈 마디마디가 시렸고 꼬리뼈가 너무 아파서 밤마다 끙끙 거렸다. 가장 두려웠던 건 어른들말처럼 산후풍이 평생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나아질까?정말 나아지긴 하는 걸까?
아침에는 물 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워서 일어나지 질 않고 마라톤 완주를 한 것 같은 탈진 상태로 하루 종일을 보냈다. 영양제는 효과가 없는데 한약을 먹으면 좀 나아져서 한약 짓는데만 몇 백만 원을 썼다. 그동안 아껴서 모은 돈을 이렇게 다 써버리는구나... 허탈했다.
나의 약한 위장을 닮아서인지 첫째도, 둘째도 식도 역류가 심해서 6개월 때까지 분유를 잘 먹지 못했다. 차라리 다 먹고 나서 토했으면 좋겠는데 몇 모금 먹자마자 또 속에서 분유가 역류했나 보다. 아이는 분명 배고파서 우는데 분유를 주면 한 모금 먹더니 고개를 뒤로 젖히고 안 먹겠다고 운다. 역류가 좀 나아지길 기다리면서 아이를 세워서 안고 달래다가 10분 뒤에 다시 먹여보고 또 달래 고를 반복했다. 밤에 배고파서 깬 아이가 잘 먹질 못하면 남편이 아이를 업고 밖에 나갔다. 배고픈 아이가 울다 지쳐서라도 잠들길 바라면서 비 오는 새벽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이게 과연 한 사람이 해낼 수 있는 일인가? 친정 엄마는 아빠와 이혼하고 나서 어릴 적에 연락이 끊겼고, 아빠는 돌아가셨고, 남편은 야근을 했고, 시댁은 멀었다.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다.
첫째는 빨리 동생을 내려놓고 자기랑 놀아달라고 떼쓰지, 둘째는 역류 때문에 배고프다고 울지... 게다가 배불리 먹지 못한 둘째는 잠도 오래 자지 못했다. 나는 우는 둘째를 안고 악- 악- 비명을 지르며 첫째 앞에서 미친 사람처럼 울어버렸다. 그때 충격받은 첫째의 얼굴이 아직도 선명히 기억난다. 그 날 둘째가 잠들고 나서 침대에 누웠다. 놀란 첫째를 토닥토닥 달래주며 '네 탓이 아니야, 엄마가 그냥 너무 힘들어서 그랬어.'라고 말해주었다.
삶이 내게 준 입덧, 산후풍, 식도 역류의 <불행 3종 세트>를 받고 자발적인 수험생활까지 합쳐서 장장 4년의 시간 동안 매일 고행길을 걸었다. 정말 가지 않을 것 같던 시간도 조금씩 지나갔다. 점차 몸도 회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