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였냐, 내 지루한 일상의 범인이? #2

가성비를 버리자 설렘이 찾아왔다.

by shining days

폭풍우처럼 몰아쳤던 시간이 지나자, 지친 마음은 우울증이 되었다.


육아에 대한 신비로움은 어느새 벗겨지고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만 남았다. 바깥바람을 쐬며,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 있어야 생기가 도는 외향인에게, 말 못 하는 아기와 단둘이 집에 있는 건 쉼이 아닌 감옥살이였다.


기와 장난감 놀이를 하면서도 나의 시선은 창문 밖의 사람들에게 닿아있었다. 린 아기와 껌딱지처럼 붙어있어야 했기에 나의 자유는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고, 그때쯤 남편과도 자주 다투 우울증은 점점 심해져갔다.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요? 혹시 조리원?"


첫째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에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조리원에서 대화 한 번 못 했었지만 그때도 활짝 웃는 모습만큼은 참 인상 깊었던 사람이었다. 우린 연락처를 주고받았고 그 뒤로도 일주일에 한 번씩 카페에서 만나거나 서로의 집에(사실, 대부분은 언니네 집에) 놀러 가게 되었다. 연락처를 주고받을 때처럼, 우리의 만남 역시도 언제나 먼저 연락해주는 언니 덕분이었다.


나는 참 예측 가능한 사람이다. 카페에 가면 늘 바닐라라떼를, 중국집에 가면 짜장면을, 스파게티를 먹을 땐 까르보나라를 고른다. 이렇게 매번 똑같은 것만 고르는 건 괜히 새로운 걸 도전했다가 입맛에 맞지 않아서 돈이 아까울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었다. 내가 지불한 돈보다는 만족스러워야 한다는 가성비란 기준 앞에서 실패할 확률을 줄이려면 늘 내가 잘 아는 맛, 늘 먹던 그 메뉴를 골라야 했다.


그렇게 매번 바닐라라떼를 시키는 동안, 언니는 새로운 메뉴에 도전했다. 그 덕에 나도 말차라떼, 달고나라떼, 반미, 스콘 등 다양한 메뉴들을 한 입씩 맛볼 수 있었다.


가끔 아이가 유모차에서 잠들었을 때 오랜만에 찾아온 이 시간을 즐기려고 책을 들고 혼자 카페에 가면, 그 언니는 늘 새로운 사람들과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린 아기와 함께인데도 아주 여유가 넘치게, 무척이나 즐거운 모습으로..


어쩜 우린 똑같이 4살, 2살의 아이 둘을 키우는 데, 우리의 모습은 이렇게나 다른 걸까? 언니는 마치 삶 속에서 마주치는 기회들에 마음을 활짝 열어놓은 사람처럼, 누구든 두 팔 벌려 반갑게 맞을 준비가 된 사람처럼 그렇게 살고 있었다.



내 일상이 매일 똑같다고 느껴졌던 건 일상이라는 이름의 작은 동그라미 속에 스스로를 가둬뒀기 때문은 아닐까?

가성비라는 색안경을 벗으니 카페 메뉴판을 빽빽하게 채운 음료들이 보였고 내 옷장을 가득 채운 예쁜 옷들도 보였다. 입맛에 안 맞으면 돈이 아까울 까 봐 새로운 음료들을 먹어보지 않았고 아끼는 옷을 아이가 망가뜨릴까 봐 목이 다 늘어난 후줄근한 옷만 입었는데..


생각해보니, 심야 영화를 보려고 했다가 평점이 낮으면 별로일 거라고 단정 지은 적도 많았다. 타인의 취향을 내 것이라 착각했다. 난 의외로 B급 마니아 감성일지도 모르는데... 내가 안 가고, 안 보고, 안 하고선, 가만히 있으면서 세상엔 도무지 재미있는 일이 없다며 지루해했나 보다.


늘 바닐라라떼만 먹었던 것처럼 사람도 편협하게 사귀진 않았을까? 내가 진짜 마음을 열어도 되는 사람인지, 나랑 잘 맞을 것 같은지 돌다리를 두드리며 따지고 또 따지진 않았을까? 내가 투자한 시간과 노력보다 더 많은 만족을 주는 사람인지를 가늠하며 부끄럽게도 인간관계에서도 가성비를 따졌던 건 아닐까..




오늘은 늘 먹던 것 대신 흑임자라떼에 도전해봤다. 문득 어릴 적 문방구 앞에서 뽑기를 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뭐가 나올까 기대하며 동전을 넣고 드르륵, 손잡이를 돌리는 그 기분처럼.. 맛이 어떨지 궁금했다.


다행히, 도전 결과는 꽤 만족스러웠다. 아주 맛있었으니까! 오늘은 바닐라라떼보다 흑임자라떼가 더 탁월한 선택이었다며 혼자 칭찬했다. 새로움을 한 모금, 한 모금 느낄 때마다 오늘 하루치의 설렘이 들어왔다.


혹시 맘에 안 드는 게 나와도 뭐 어때. 내일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걸 뽑을지도 모르는데!


오늘은 어떤 예쁜 옷을 입을까, 점심엔 특별한 걸 먹어봐야지, 저녁엔 남편에게 아이들을 부탁하고 혼자 카페에 가봐야겠다 생각하며, 사소하지만 특별한 시간을 나에게 선물하려고 노력했다.


둘째의 낮잠 시간이 조금 늦어지더라도 멀리까지 산책을 해보고, 어린이집에 갈 때도 그동안 가보지 않았던 다른 길로 돌아가면서 일상 속에서 낯선 순간들을 선택했다.

계절에 따라 변하는 나뭇잎 색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구름이 움직이는 것도 멍하니 쳐다보고, 새로 핀 꽃들도 가만히 구경했다. 똑같아 보이는 일상이었지만 실제로는 그 안의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었다.


언젠간 바닐라라떼보다 더 내 입맛에 맞는 걸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어릴 땐 먹지 않던 음식을 지금은 좋아하게 된 것처럼 내 취향도 언제 갑자기 바뀔지 몰라. 자꾸만 새롭게 경험해보지 않으면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점점 나를 잃어버리게 될지도 몰라.


다른 애들은 몰라도 쟤랑은 진짜 친해지는 일 없겠다 싶었던 친구가 있었다. 15년의 세월이 지나고 다른 친구들은 다 연락이 끊겼지만 생각하는 것도 너무 다르고 대화도 잘 안 통하던 그 친구랑은 아직까지 연락하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는 그냥 친구였는데, 지금은 누구보다 가장 의지가 되는 친구가 되었다. 그것도 불과 최근 1년 전쯤부터.. 참 신기하다. 너랑은 정말 이렇게 될줄 몰랐는데.. 언제, 어디서 인연이 나타날지 모르는 게 인생인가 보다.


너무 힘든데 그저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려야 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내일은 반드시 오늘보다 나아질 것이다'라는 기대를 포기하지 않는 것, 그리고 오늘을 버틸 수 있도록 일상에 숨어있는 사소한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다. 기쁨의 순간을 언제 마주할지 모르기에 아주 작은 것에도 마음을 활짝 열고 있어야 한다.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발견했다.

'아침이 되면 다시 신나는 일이 일어날 거예요. 모두 예쁜 꿈 꾸세요.'

오늘 힘들었던 일은 다 잊고 가장 행복한 꿈을 꿀 준비를 해야지. 내일은 새로운 일들이 나를 기다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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