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이 다 죽으면 나는 고아원에 갈 거야

내가 공부를 좋아하게 된 이유

by shining days

알코올 중독자들의 술 마시는 모임. 그중 한 분이 어제 돌아가셨다. 이번이 벌써 두 번째. 소주를 홀짝홀짝 마시던 아빠가 어린 나를 앞에 앉혀두셨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연세가 많으셔. 아빠도 다른 삼촌들처럼 금방 죽을 것 같아. 너희 엄마는 어디서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우리 가족이 다 죽으면 넌 어느 고모네 가서 갈래?"


3명의 고모. 33%의 확률.

"고모들 집엔 안가. 남의 집에 얹혀사는 건 불편해서 싫어. 난 고아원에 가서 살 거야."


울지도, 떨지도 않는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아빠는 그 후로도 몇 번을 물었지만 내 대답은 한결같았다. 난 고아원으로 갈 거야.




할머니는 고모들과 통화하면서 늘 내 흉을 봤다. 내가 듣는 앞에서. 나를 쳐다보며.

"어제도 어찌나 짜증을 부리던지. 맨날 말대답이나 하고. 그리고 쟤는 밥을 너무 안 먹어. 오늘 저녁에도 굶었어." (그래, 치킨은 할머니 기준에 밥이 아니지.. 암.. 아니고 말고.)


억울한 누명(?)을 써도 변명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고모들과 나는 명절에 한 번 만나는 게 고작이었으니. 가끔 고모들이 집에 찾아오기도 했지만 날 보러 오는 게 아니라 할머니, 할아버지나 아빠를 만나러 오는 거니까. 고모들에겐 자기 엄마를 괴롭히는 못된 조카로 보이지 않을까? 만나면 용돈을 주시기도 했지만 그 돈이 마치 할머니를 힘들게 하지 말라는 담으로 느질 때도 있었다.


얼마 전, 아빠가 고모부 직장에 찾아갔 돈을 빌려달라고 했단 얘길 들었다. 아빠가 갚지 않을 걸 알면서도 고모부들은 번 지갑을 열 수밖에 없었다. 게 술 취한 아빠를 내쫓을 가장 빠르고 조용한 방법일 테니까. 아빠가 저질러 놓은 만행들을 들을 때마다 나까지 친척들에게 짐이 되긴 싫었다.


고모 집에 얹혀살면 내 또래의 사촌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것도 뻔했다. 고모들도 사람인데 자기 자식이 아닌 날 짐처럼 느낄 때가 있겠지. 눈치 빠른 내가 그걸 너무 잘 알아챌 것 같아서 고모들 집에 가긴 싫었다.


그러나 아빠의 잔인한 질문은 엄청난 후폭풍을 일으켰다. 린 나는 당장 가족들이 죽을 것처럼 불안해졌다.

'요리도 할 줄 모르는데. 통장에 있는 돈을 어떻게 뽑는 거지? 전기세는 어떻게 내는 거야?'

9살에게 어울리지 않은 고민이었다. 장밋빛 미래를 그려볼 나이, 아니 그런 것쯤은 진지하게 생각도 해보지 않을 나이 나는 생존에 닥친 위협을 어떻게 헤쳐나가야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다는 늘 불안하고 두려웠다. 머니, 할아버지는 연세가 많으셨고, 아빠는 늘 생에 미련이 없는 사람처럼 술을 마셨다. 마음을 나눌 형제자매도 없었. 하루아침에 세상이 다 무너져내려도 전혀 이상할 게 없 나에게 생이란 그렇게 연약한 것이었고, 목숨이란 그렇게 부질없는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은행에 가실 때 처음으로 쫓아가 봤다. 아, 이렇게 돈을 인출하는 거구나 꼼꼼히 눈으로 익혀두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들에 기댈 수가 없어서 초등학교 2학년 때, 동네 친한 언니와 함께 가까운 신문사에 찾아간 적이 있다. 학교를 다니면서 새벽에 신문배달을 하겠다는 야심 찬 주장을 펼쳤으나 누가 들어도 코웃음 칠, 없는 어린이의 이야기였다.


당장 돈을 벌 수다는 걸 깨닫고 공부로 방향을 틀었다. 어른들의 말처럼 좋은 대학을 가서 좋은 직장을 다게 된다면, 공부를 잘할수록 미래가 튼튼해질 것 같았다. 나중엔 학교를 못 다닐 수도 있어. 공부할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해 배워둬야 해. 아무도 내게 공부를 강요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언제가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열심히 배웠다.


가진 것도 별거 없었지만 그 별거 아닌 것마저도 전부 값지게 느껴졌다. 언제 잃을지 모른다 생각하니 단 한 가지라도 값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으로 올라갈 때, 처음 속셈학원을 다니게 됐다. 내가 아는 영어는 알파벳 a, b, c, d... 와 good morning이 전부던 시절. 학원 선생님께서 질문을 하면 난생처음 듣는 것들 뿐인데, 친구들은 그까짓 거 아주 쉽다는 듯 대답을 척척한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두 배, 세 배 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친구들 발꿈치도 못 따라가겠어.


"오늘 단어시험에서 5개 이상 틀린 사람들은 토요일에 보충수업 나와." 나는 매번 100점을 맞았다. 그런데도 매주 보충수업을 들으러 갔다.

"넌 안 와도 되는데 왜 또 왔어?"

"잘 모르는 부분이 있어서 한번 더 듣으려고요."

unsplash

학원 선생님들은 그런 나를 기특히 여기셨다. 르는 문제를 질문하러 가면 맛있는 음식을 나눠주시기도 하고 문제집을 공짜로 주시기도 했다.


중학교 졸업식날이었다. 가족들에겐 학교에 오지 말라고 했다. 엄마 없는 걸 친구들에게 들키는 게 싫어서. 그래서 꽃다발 하나 없이, 사진 한 장 없이 조촐하게 졸업식을 마쳤다. 집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가족들은 각자의 삶에 지쳐서 내 머리 한번 쓰다듬어줄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다.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 졸업식, 특별할 거 없던 하루였다.


학원에 가니 선생님께서 나를 조용히 부르셨다. "졸업 축하해."라며 영영사전을 선물로 주셨다. (알고 보니 나만 받은 특별한 선물이었다.)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시느라 형편이 넉넉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 귀하고 값진 선물이었다. 다른 선생님들께서도 수고했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는데 그 손길이 참 따뜻했다. 아.. 사랑받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방학식보다 개학식이 더 좋았다. 학원 가는 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 학교와 학원은 놀러 가는 곳이고, 수업시간은 칭찬받는 시간이었다. 시험날짜가 다가오면 칭찬받을 시간이 다가오는 것럼 설렜다. 시험 끝나면 빨리 학원에 가서 내 점수를 자랑해야지. 자꾸만 인정받고 사랑받으니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자꾸만 잘한다, 잘한다 하니 기대에 부응하려고 더 열심히, 더 신나게 공부했다. 우울한 집보다 교실에 있는 게 더 행복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신기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어떻게 공부를 좋아할 수가 있어? 넌 정말 특이하고 이상한 애야."


수능 시험을 보고 나서 친구들이 한 풀이하듯 실컷 놀 때 나는 신촌에 있는 큰 영어 학원에 등록했다. 이제 3월까지 자유시간이니 하고 싶은 걸 맘껏 하자(?)싶어서. 기껏 하고 싶다는 게 공부라니... 추운 겨울, 깜깜한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매일 새벽기도도 나갔다. 학원비를 벌기 위해 오후부터 밤 12시까지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수능 공부할 때보다 더 잠을 못자는 이상한 날들을 보냈지만,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데 스스로 원해서 하니 더 재밌었다.


처음엔 생존을 위해 시작한 공부였다. 결핍으로 시작한 공부가 어느새 나의 강점이 되었다. (남들에 비해 잘한다가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 중에 공부를 제일 잘하니까요.) 아무것도 자랑할 게 없던 내가, 가진 것 하나 없던 내가 공부로 인해 자존감이 높아졌다. 무언가에 집중하고 좋은 결과를 내는 경험을 해보니, 나 좀 멋진 사람 같아! 자아효능감이 뿜뿜 솟았다. 잘하는 게 딱 하나만 생겨도 삶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구나.


원래부터 공부에 재능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플래쉬' 영화처럼 극한의 상황이 잠재력을 극대화시키기도 한다. 현실이 나를 채찍질할 때, 세상이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울 때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이런 걸 이렇게까지 잘할 수 있는 사람이었나? 에게 이런 재능이 있었구나."


풍전등화처럼 인생이 언제 꺼질지 몰라 불안했는데 얼마 전, 무사히 34번째 생일을 맞았다. 것도 제법 안정적으로, 행복하게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불었다.


내 인생의 시계는 거꾸로 흐르는 듯하다. 아이를 낳고 나니 더 그렇다. 어릴 적엔 늘 죽음이 눈 앞에 있다고 느꼈는데 지금은 내 삶이 이렇게나 생명에 가까이 있다니... 시간이 흐를수록 죽음보다 생명에 더 가까워졌다는 게, 그저 신기하고 놀라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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