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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ning days Feb 21. 2023

간경화 말기입니다

아빠는 더이상 술을 마시지 않았다.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단 걸 깨달았는지, 더이상 우리에게 난폭하게 굴지 않았다.


아빠의 몸이 많이 말라있었다. 몇달 동안 밥도 먹지 않고 강술만 마셔댔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우리가 떠나있던 동안 얼마나 오래 술을 마셨는지, 밥과 반찬은 어떻게 해결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주야장천 술만 들이붓다가, 어느 날엔 뚝 끊었다가, 또다시 술만 마시는 게 아빠의 중독 패턴이었기에, 몸이 안 좋아 보여도 그냥 또 그런가 보다 했다. 밥만 잘 먹으면 다시 나아질 줄 알았다. 


아빠는 옛날부터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그게 다 그놈의 술 때문이었다). 한겨울 밤중공사장 구덩이에 빠져 얼어죽을 뻔하기도 하고. 같이 술 마시던 사람이 아빠의 머리에 소주병을 내리꽂아서 끈적한 피범벅이 된 채로 들어와 까무러칠 뻔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절제수술이나 급성 췌장 등 일일히 다 기억도 하지 못할만큼 사건사고가 참 많았다.


그때마다 이러다 아빠가 돌아가실까봐 걱정스러웠지만, 사람 명줄이란 게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질겼다. 매번 마지막이란 단어에 속아 울고불고 힘들어했지만 결국엔 다 무사히 잘 넘어갔질 않는가. 이젠 롤러코스터 같은 감정 변화에 질질 끌려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최종합격까지 면접도 남아있는 상태였고, 7급 시험준비도 병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야할 일이 산더미였다. 이번에야말로 뚝심있게 눈 앞에 주어진 일에만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아빠의 몸이 이상했다. 임신일리도 없는데 배가 불룩했다. 을 마시지 않을 땐 집에서 혼자 아령을 들고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 살찐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흰 티 아래로 그려지는 아빠의 실루엣이 낯설었다. 큰 병원에 가봤더니 복수가 차서 그런 거라고 했다. 간경화 말기였다.


아빠는 점점 움직이길 힘들어했다. 혼자 앉는 것조차 버거워해서 병원 침대를 거실에 들여야 했다. 밥 먹을 땐 리모컨 버튼을 눌러 침대 머리맡을 높여 앉고, 다리가 아플 땐 다시 버튼을 눌러 다리 쪽 침대를 심장보다 높게 올렸다. 모든 움직임을 손가락 끝에 있는 작은 버튼에 의지해야 했다. 30도로 팔을 벌리면 양쪽 끝이 닿는 좁은 침대가 아빠의 세상이 됐다. 먹는 것, 자는 것, 싸는 것 모두 그 안에서 해결해야만 했다.


종일 누워있으니 소화 불량에 시달렸다. 변비가 심해져 자연적으로는 배변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머니, 할아버지가 일회용 비닐 장갑을 끼고 마른 변을 파내기도하고 주기적으로 관장도 해줘야 했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으면서도 하루에 몇 번씩 샤워를 하던 깔끔한 아빠가, 자기 방엔 남들이 들어오지도 못하게 할만큼 결벽증이 있던 아빠가, 이제는 가족들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돼버렸다.


누운 자세조차 마음대로 바꾸지 못하는 답답함에, 아빠의 짜증은 날로 늘어갔다. 늦게까지 면접 스터디를 하느라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오면 아빠는 아픈 자신을 내팽개쳐뒀다고 화를 냈다. 아빠가 어떻게 되든 말든, 저 혼자만 잘되려고 하는 이기적인 애라고 쏘아붙였다. 왜 나만 관장을 안 해주냐며 미워하기도 했다. 날 사랑해 주던 아빠였는데, 이젠 내가 싫어진 것 같았다. 이젠 사사건건 다 마음에 안 드나보다. 날 보는 눈빛이 예전과 많이 달라져있었다.


집에 들어갈 때마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문 앞에 서서 잠깐씩 심호흡을 해야했다. 오늘은 또 뭐라고 짜증을 낼지……. 아빠가 자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현관 문고리를 잡고 기도했다.


"아빠가 짜증내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자식이 아닌 부모의 마음으로 아빠를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세요. 아빠가 예전처럼 다시 나를 좋아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아빠를 워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직은 좋았던 추억들이 많이 있었다. 앨범을 꺼내면 사진 속의 아빠는 어린 나를 안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오늘도 짜증을 내는 아빠에게 그저 알겠다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인상을 쓰는 아빠에게 웃어 보이려 애썼다. 그게 내 진심이란 걸 아빠에게도 전해지길 바랐다.


하루는 아빠가 발이 너무 아프다 말했다. 자세히 보니 발가락 끝이 시커멓게 있었다. 119를 불러 응급실로 갔더니 곧바로 중환자실로 옮겨줬다.


불룩해진 배도, 움직이지 못하는 아빠도, 썩어가는 발 모든 게 너무나도 갑작스러웠. 그래도 얼마 후엔 아빠가 다시 집으로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게 빨리 아빠의 마지막을 맞을 줄은, 정말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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