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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ning days Feb 17. 2023

포기하면 그 순간이 바로 시합 종료예요 - 슬램덩크 中

내 경기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1월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때부터는 아르바이트도 하지 않고 공부에만 매진했다. 다만 몸이 좋질 않아 걱정이었다. 그동안 마음 고생, 몸 고생을 심하게 해서인지 기력이 다 소진된 상태였다. 앉아서 책을 읽다보면 열이 나기 시작했고, 숨쉬기가 힘들만큼 맥박이 빨라졌다가 열이 내리고 나면 한기가 돌면서 기진맥진한 상태가 지속됐다(사실 이런 상태가 된지 벌써 1년이 넘었다).  


4월 1일. 이제 시험까지 10일 밖에 남질 않았다. 봄이 되니 알레르기까지 더해져 몸이 더 약해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열이 나고 몸이 급격하게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4월 5일. 시험 5일 전인데 몸살에 걸려버렸다. 못 산다 진짜. 첩첩산중, 점입가경이다.


병원에 가니 의사는 푹 쉬어야 빨리 낫는다는 속 좋은 소릴 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것보다 두 발로 직접 뛰는 게 더 낫다 생각하느 성질 급한 나에게 '가만히 누워서 쉬세요'는 고문과도 같았다. 다른 수험생들은 막판 스퍼트를 내며 빠르게 뛰다 못해 날아다니는 것 같은데 나는 하루종일 누워있었다. 벌어진 거리를 다시 따라잡지 못할까 봐 조바심이 났다.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3일 내내 잤다. 식사 시간에만 일어나 억지로 밥을 먹고 약을 털어 넣었다. 왜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아픈가 싶어 속이 터질 것 같았지만 그럴 때마다 체온이 더 높아져 마음껏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의사의 말을 떠올렸다. 그래, 푹 쉬고 빨리 낫자. 그것만이 살 길이다. 합격할 수 있을 거라고. 좋은 점수로 붙을 거라고. 공부한 건 다 내 머릿속에 있으니 증발되지 않을 거라고 나를 다독였다. 상황이 나를 흔들지라도 뿌리째 흔들리지는 말자고 수도 없이 다짐했다. 


밥 먹을 때마다 TV를 봤다. 잡생각을 비워내고 생각없이 웃었다. 흔들리지 않겠다. 과정이 힘들어도 결과만 좋으면 ,되니 나는 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슬램덩크의 명대사가 떠올랐다. "포기하면 그 순간이 바로 시합 종료예요." 그래, 포기란 없다. 내 경기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까.




4월 11일 토요일. 드디어 시험날이 밝았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말갛게 세수를 하고 아침밥을 먹었다. 체하지 않게 천천히 꼭꼭 씹어먹었다.


6시 40분.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토요일 새벽이라 세상은 아직 잠들어있는 듯 했다. 지하철엔 빈자리가 듬성듬성했다. 1시간 정도 요약노트를 읽다 보니 내릴 역에 다다랐다. 거북이 등딱지처럼 커다란 가방을 멘 사람들이 같은 방향으로 걸어갔다. 나처럼 오늘 시험을 보러가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이 중에 몇 명이나 합격할까 생각하며 그들의 발뒤꿈치를 따라 계단 위로 올라갔다.


에 도착하니 학원홍보물을 나눠주는 사람들이 서있었다.

"시험 잘 보세요."

꼭 그럴 거라고, 속으로 혼자 대답하며 캔커피와 노트를 받아 들었다.


수험표를 꺼내 교실 위치를 확인하고 중앙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8시 10분. 난방을 틀지 않은 교실이 약간 쌀쌀하게 느껴져 얇은 가디건을 꺼내 입었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더니 슬슬 졸리기 시작한다. 조는 것보단 자는 게 나을 것 같아서 20분 정도 책상에 엎드려 잤다. 따뜻한 맥심커피를 마시니 익숙한 커피향이 정신을 맑게 깨웠다. 


9시가 되자 시험감독관 2명이 교실로 들어왔다. 책상 위에 수험표, 신분증, 시계, 샤프, 지우개, 컴퓨터용 사인펜만 남겨두고 모든 짐을 교실 앞에 갖다놓았다. 교실 안엔 적막감이 감돌았다. 그 순간 눈을 감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오늘이 마지막 시험이 되기를. 이번엔 꼭 합격할 수 있기를. 


제를 푸는 동안 열나지 않고, 숨도 차지 않게 해 주세요. 실수하지 않고 시간에 맞춰서 잘 풀 해 주세요. 간당간당하게 말고 넉넉한 점수로, 안정권으로 붙게 해 주세요. 제발, 제발.

 



문제를 다 풀었다. 시계를 보니 아직 시험 종료까지 20분이나 남아있었다. 별표 쳐둔 3문제만 남겨두 마킹을 시작다. 손바닥에 땀이 난다. 사인펜이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조심 꼼꼼히 마킹해 나갔다.


이제 13분 남았다. 별표 친 문제를 다시 읽으며 정답을 고민다. 모든 문제를 마킹하고 다시 한번 시험지와 마킹지를 찬찬히 훑어봤다. 아직도 3분이 남아있었다. 띠리리링. 시험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드디어 끝이 났다.


실을 나서는 사람들의 얘길 들어보니 어려웠다는 평이 많았다. 가채점을 해봐야 알겠지만 크게 못봤단 느낌은 들지 않았다. 기분이 후련했다.


교문을 나서 다시 숨이 차 시작했다. 이마를 만져보니 체온이 제법 뜨거웠다. 입고 있던 가디건을 벗고 등에 멘 가방도 앞으로 고쳐멨다. 그늘을 찾아다니며 가다 쉬다를 반복하니 전철역에 도착했을 땐 이미 대부분의 수험생들이 빠져나간 뒤였다. 다행히 앉을자리가 있어서 좋았다.


집으로 돌아와 쓰러지듯 누워 눈을 감았다. '다행이다. 시험 볼 때는 안 아파서. 다 끝나고 아파서 정말 다행이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니 몸이 개운했다. 옷장을 열 오랜만에 예쁜 옷을 골라 입고 집을 나섰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길을 느긋하게 걸었다. 새햐안 꽃송이가 나뭇가지마다 무겁게 매달려있었다. 오늘에서야 봄을 제대로 맞이하는 듯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때마침 바람이 불어와 꽃잎이 나풀나풀 휘날렸다. 몸도 마음도 구름처럼 가벼웠다.


시립도서관에 들 구석진 컴퓨터 자리에 앉아 오늘 본 시험지를 폈다. 홈페이지에 올라온 정답을 보면서 빨간 색연필을 들고 떨리는 마음으로 채점을 했다. 자격증 점수까지 합치니 93점이 나왔다. 공시생카페에 들어가 격 예상 커트라인을 확인해보니, 내 점수는 그보다 5점이 높았다. (마킹 실수를 한 건지 실제로는 92점으로 나왔다.)


오늘부터는 두 발 뻗고 편히 잘 수 있겠구나 싶었다. 지긋지긋한 시험불안증을 극복했다는 희열감이 들자, 이젠 어떤 상황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나를 막아서 수많은 벽을 딱 한 번만 넘어보자 했는데, 드디어 첫번째 도약에 성공했다. 

외줄 타기 같던 인생에서 처음 평지를 밟은 안도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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