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예쁜 말 대잔치

오늘도 아이에게 실컷 사랑받았다.

by shining days

오늘 아침, 어제 잃어버린 장난감 팔찌를 찾아줬더니 아이가 방방 뛰며 신이 났다.

"엄마~~ 최고! 짱이야!" 급기야는 "엄마 예뻐!"


그리곤 팔찌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서 보여준다.

"하트 뿅뿅~ 하트 뿅뿅~ 엄마 사랑해요!"


하트 뿅뿅~

이렇게 아이에게는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나지만.. 엄마의 사랑은 한 번도 받아본 기억이 없다.


우리 아빠는 결혼하고 나서야, 엄마가 다니는 교회가 이단이라는 걸 알게 됐다고 한다. 아빠가 얼마나 많이 술을 마시는지, 엄마가 얼마나 이단 종교에 열심이었는지 서로를 깊이 알아볼 새도 없이 서둘러 결혼을 했던 것 같다.


가족들이 밤낮으로 설득했지만 엄마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두 분은 종교 갈등으로 내가 돌이 되었을 즈음 이혼하셨다.


어머니, 저는 우리 애가 이쁜 지를 모르겠어요.


화장실에서 나를 씻기던 엄마가 할머니에게 한 말이었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걸까? 드라마를 보면 내 자식은 절대 포기 못한다며, 엄마들이 기를 쓰고 자식을 데려가던데.. 우리 엄마는 딸도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홀로 집을 떠났다.


그리고는 나에게 연락 한번 없었다. 자기 배 아파서 낳은 딸이 잘 지내는지, 얼마나 예쁘게 컸는지, 학교에서 공부는 잘하는지.. 정말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았나 보다. 내 성적표에 전과목 '수'를 받도 남의 엄마들한테만 실컷 칭찬받았다.


엄마는 양육비도 제 때 안 줬다. 양육비 들어오는 날짜가 자꾸만 늦어지자, 기분 나빠진 할머니가 이런 식으로 할 거면 앞으로 보내지 말라고 했더니 냉큼, 바로 다음 달부터 돈이 끊겼다고 한다.


할머니에게 들은 엄마 얘기라고는 쌀쌀 맞고, 못되고,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게 전부였다. 엄마와 헤어진 뒤로 아빠는 더 술에 매달렸고 할머니가 갓난아기였던 나를 도맡아 키우셨으니, 前 며느리를 향한 할머니의 미움이 오죽했을까. 할머니는 남편과 딸을 내팽개치고 간 엄마는 그리워할 필요도 없다며 나에게 단단히 주의를 줬다.


그렇다고 아빠에게 엄마 얘길 물어볼 수도 없었던 것이 그럼 그 날부터 몇 날 며칠을 밥도 안 먹고 술만 퍼부어댈 게 뻔했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엄마는 마치 볼드모트 같았다.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되는 자였다. 아빠의 재혼을 염두에 뒀던 할머니가 엄마의 사진을 모두 갖다 버려서 나는 엄마의 얼굴도, 이름조차도 알지 못했다. 사진도, 추억도, 엄마의 물건도.. 나에게 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비빌 언덕이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공부밖에 없었다.

독서실에서 공부하다가 새벽 2시에 들어온 나를 아빠가 붙잡았다. 나를 옆에 앉혀두고 술을 마시면서 맨날 했던 그 얘기를 또 하고, 또 했다. 좁은 방 안에서 내가 싫어하는 담배 피울 땐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다!


참자.. 참자... 무서운 아빠 성격을 알았기에 참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힐끗 시계를 쳐다보니 벌써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빠, 나 내일 시험이라서 이제 자야 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공부해야 할 것도 아직 남았어."


"너는 이 아빠가 불쌍하지도 않니? 가만 보면 넌 네 엄마랑 똑같아. 아무리 내 딸이지만 어쩜 그렇게 사람이 독하냐? 어? 사람이 그렇게 독하면 못 쓰는 거야! 너 혼자 들어가서 실컷 잠이나 자!!"


황당하다. 아니, 졸려 죽겠는데도 불평 않고 얘기를 다 들어줬는데 내 수고에 대한 보답이 기껏해야 '독하다'라는 비난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내가 독한 게 아니라, 조금만 힘들어도 술로 도피하는 아빠가 지. 나. 치. 게. 연약한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못 들은 척 뒤돌아섰다. 하고 싶은 말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말한다고 바뀌지도 않을 텐데 굳이 아빠 화를 돋울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랬다간 새벽 4시에 자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진짜 엄마를 많이 닮았을까? 아빠가 엄마를 닮았다고 했던 건 딱 한번뿐이었지만, 내가 알던 사람 중에 가장 나쁜 사람이 엄마였기에, 그 말은 거의 나를 악당 취급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가끔 내 말투가 차갑게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엄마랑 같이 살지 않아도 내 안에 흐르는 엄마의 피는 못 속이는 걸까 좌절감이 들기도 했다. 내 단점이 보일 때마다 이것도 엄마의 DNA일까 생각했다. 보지도 못한 엄마는 내 상상 속에서 점점 더 피도 눈물도 없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갔다.


결정적으로, 사회복지 전공을 하면서 알게 된 '모성의 대물림'은 나에겐 저주와도 같은, 참 무서운 말이었다.


나는 그런 엄마와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내가 과연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첫째가 세상에 태어난 날. 너무 예쁘다♡

출산한 날, 아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사람이 이렇게 예쁠 수가 있나? 말도 안 된다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갓 태어난 아기는 머리가 외계인 같이 뾰족하다던데? 피부도 빨개서 불타는 고구마같이 못생겼다던데? 하지만 내 침대에서 쌔근쌔근 자고 있는 이 녀석은 소문과 달랐다. 사람이 이 이상 귀여워지는 건 불가능하다! 이건 진짜 확실하다!


자식은 하나만 낳을 거라던 결심이 흔들려버렸다. 무통주사도 안 맞아서 자연분만의 고통을 고스란히 다 겪었고 회음부가 찢어져서 제대로 앉을 수도 없었지만 나는 산부인과 병실에 누워서 벌써부터 둘째를 가질까 고민하고 있었다.


예쁜 이 모습을 평생 한번밖에 못 본다는 게 너무 아쉬워서 잠자는 것도 아까웠다. 아홉 달을 꽉 채운 입덧과 출산 후 산후풍으로 삐걱대는 몸도 아이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식힐 수 없었다.




그랬던 아이가 벌써 4살이 되다. 고민하던 둘째도 결국 낳고야 말았다. 첫째가 말을 하기 시작한 뒤 갓난아기 일 때와는 또 다른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즘은 하는 말마다 예쁜 말 대잔치다.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엄마가 그렇게 많~이 좋아요.


우리 첫째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잠도 덜 깬 채로 사랑 고백을 한다.



< 일상 1. 첫째가 안겨있는 중 >


"이제 내리자~"

그러자 내 목을 더 세게 끌어안는다.


"안겨 있는 게 그렇게 좋아?"

"엄마가 그렇게 많이 좋아요~"

편해서 좋은 게 아니라 내가 좋아서라니.. 이런 기특한 아들 누구 아들이더라?


"이제 진짜 힘드니까 그만 내려오자~"

쪽쪽~ 이번엔 내 볼에 뽀뽀를 한다.


"엄마, 온유가 뽀뽀해줘서 힘났어요?"

"아이고.. 힘이 나긴 했는데 그래도 너무 힘들어."

"엄마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엄마 힘내세요~! 우리가 있어요~"


이 녀석.. 어떻게 하면 내가 좋아할지 다 꿰뚫고 있지? 계속 안아주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든다.



< 일상 2. 놀이터에 다녀와서 침대에 뻗어있는 중 >


"야..! 엄마 배 위에 너희 둘 다 올라가면 무거워! 그리고 그렇게 엉덩이를 콩콩 들썩이면 엄마가 아프잖아!"

놀이터에서 둘째가 넘어질까 봐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녔더니 진이 다 빠졌다. 그런 나를 잠시도 쉬게 놔두질 않는다. 으~ 짜증이 나려고 한다. 내 안의 헐크가 깨어나고 있다!


"엄마 사랑해요~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엄마가 그렇게 많~이 좋아요! 헤헤헤."



< 일상 3. 소파에서 책 읽는 중 >


"옆에 빈자리 있는데 왜 굳이 엄마한테 와. 옆으로 가서 니 책 봐. 엄마도 좀 쉬자. 엄마 힘들어."


"엄마가 따뜻해요. 그래서 엄마한테 가는 거예요."


참나.. 이러면 내가 화를 낼 수가 없잖아.. 예쁜 말로 또 나를 녹인다. 내 품이 좋다는 데 어쩌겠어. 차가운(사실 굉장히 따뜻한 재질이지만) 소파 대신 따뜻하고 푹신한 내 무릎에 앉히는 수밖에.


엄마가 좋아서 그랬다는 말은 만병통치약처럼 나의 언짢은 기분을 잠재워줬다. 나는 요즘 말 한마디로 천냥 빚 갚는다는 게 과장이 아닐 수도 있단 걸 깨닫고 있다.




우리 첫째처럼, 나도 아빠의 비타민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동네 친구들과 놀다가 저 멀리서 오는 아빠를 발견하고 "우리 아빠다!!" 자랑스럽게 소리치며 달려갔다. 그때 정장을 입고 서류가방을 든 아빠의 모습은 TV 속 배우보다도 멋있어 보였다.


세상에서 제일 멋진 우리 아빠에게 안겨서 10번이고 20번이고 아빠 얼굴에 뽀뽀세례를 퍼부었다. 아빠 품에서는 아빠가 즐겨 쓰던 향수 냄새가 났다. 나만 아는 그 냄새에 기분이 좋았다. 아빠는 술을 마실 때마다 그때가 자기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며 추억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어린 자식은 부모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준다. 부모가 잘났는지, 못났는지 따지지 않고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해준다. 내가 부족한 엄마란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아이는 그 정도쯤이야 엄마가 준 사랑에 비해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눈감아 준다.


밤이 되었다. 고요한 방 안에서 나는 지금 불을 끄고 누워서 잠든 척을 하고 있다.


'애들을 얼른 재우고 이제 내 시간을 가져야지.'

부스럭 부스럭. 아직 잠들지 않은 첫째가 슬금슬금 내 옆으로 오는 소리가 들린다. 고사리 같은 조그만 손을 나에게 뻗는다. 그리곤 내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려 준다. 아이가 나를 위해 속삭이듯이 자장가를 불러준다.


"자장자장 우리 엄마~ 자장자장 잘도 잔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도 내가 아이에게 준 사랑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 같다. 그 자장가 소리에, 토닥이는 따뜻한 손길에, 소리 없는 응원을 받았다.


나에게 엄마는,
오늘도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에요.


참 따뜻하고 힘이 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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