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만이라도 고통을 내가 '선택적으로' 피해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픔에도 '유예기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적절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지금 떠오르는 비유는 '졸업유예'가 가장 먼저 떠올랐기에 졸업유예에 비유하게 됐는데 일례로 우리가 졸업 후 취업전선에 뛰어들기 전 '졸업유예'라는 '선택 수단'이 있듯(물론 취업이라는 생존을 앞두고 '선택'이라는 단어도 적절치 않을 수 있겠지만)
우리가 겪는 아픔도(육체적 아픔. 극심한 정신적 고통이든 본인에게 정말 아프게 느껴지는 '아픔'을 의미한다.) 일정기간 유예시켜놓고 그전에 해야 할 일을 마쳐놓고 마음의 준비를 해놓는다거나, 혹은 '중요한 시기' 만큼은 피해서 아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소중한 지인들과의 약속, 혹은 오랫동안 해왔던 프로젝트·작업을 마무리하는 날을 앞두고 정말 예상치 못하게 몸이 아파버리면서 급기야 침대에 누워 끙끙 앓으며 아무것도 못하는 순간이 찾아올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 자리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이미 상태가 말이 아닌 나는 매번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무책임' 한 사람이 되고 만 적이 정말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요한 일정이 있으면 캘린더를 수시로 확인하며 '강박'처럼 일정에 대한 압박감을 느끼고 예기치 못한 컨디션에 대한 '불안감'과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미리 컨디션 조절을 위해 늘 힘쓴다. 이런 나를 보고 누구는 그런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하지만 평소에 이렇게 컨디션 조절을 하지 않으면 갑작스러운 상황이 닥쳤을 때, 무력해지지 않기 위해 정말 늘 '긴장'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누구보다 간절하고 이렇게까지 노력하는데 좀처럼 따라주지 않는 내 몸 컨디션이 너무 원망스럽고 화가 날 때가 많다. 어느 순간 보면 스스로를 너무 옥죄는 것 같아 적어도 지금 현재 상황에 대한 인지는 하되, 원인 분석을 하면서까지 비관적인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저 이 힘든 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이다.
요 며칠 원인 모를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면서 3~4일 동안 정말 '관자놀이' 부분이 띵띵 거리면서 온갖 촉각 부분이 예민해지고 날이 서있는 상황이었다. 보통은 컨디션이 안 좋아도 그래도 하루 이틀이 지나면 회복됐기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회복 탄력을 위해 힘썼겠지만 이번은 달랐다. 지금 글 쓰고 있는 시점에서는 그나마 조금 두통이 괜찮아져서 다행이다. 이번에 아프면서 드는 생각은 아픔을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은 정말 서럽다는 것이고 그 순간 나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정말 '안락하고 따뜻한 보금자리' 였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응급실을 가야 할 정도로 급한 상황도 아니었고 당장 데드라인이 급한 할 일을 앞두고 몸이 너무 아픈 상황도 아니었지만 그저 나는 누군가 "괜찮아, 지금 너 옆에 있어줄게. 무언가 하지 않아도 돼. 몸이 다 나으면 그때 서서히 시작해도 돼"라고 말해줄 그 누군가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아닐까 싶다.
따뜻한 온기가 가득한 보금자리가 그리운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