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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에게 Feb 15. 2022

절교(絕交)가 필요한 시대

우리는 누구와 사귀고 있는가

우리는 너무 많은 이들과 사귄다. 그 배경에는 기회부족현상과 SNS가 있다. 정보가 곧 돈이 되고, 인맥이 자산이 되는 시대에 우리는 타인과의 교제에 쉽게 중독된다. 한 코미디언은 과거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렇게 말했다. 잘 나가는 어느 동료 방송인에게 매일 카카오톡으로 웃긴 영상을 보내는 이유에 대해 "난 가진 게 이것(웃긴 짤 보내는 것)밖에 없기 때문에 열심히 해야 한다"고. 타인과 사귀는 일이 누군가에겐 살아남기 위한 일임을 알 수 있는 예다.


1인 가구가 급증하면서 우리는 SNS를 통해 타인과 만난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쉬는 시간에, 이동하면서, 밥을 먹으면서, 잠들기 전까지. 국내 사용률 1위라 불리우는 인스타그램을 보자. 1080x1080 픽셀 사이즈의 벌판에 올라온 이미지와 글귀로 우리는 타인의 일상과 자신의 정적인 순간을 포갠다. 하트는 마치 중매자와 같다. 내가 그의 피드 게시글을 보았으며,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뜻을 전한다. 일방적인 고백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쌍방향적이다. 앱에선 매일같이 불특정다수의 고백이 범람한다. 의무가 아닌데도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만나고 있는 걸까? 있는 그대로의 외모가 아닌 수정된 외모로, 자신의 이미지 브랜딩을 의식한 글귀와 행보로 서로가 만나는 일은, 정말 만나는 행위일까? 그렇다고 나의 있는 그대로의 내면과 외면, 시시콜콜한 일상사를 올리자니, 관심을 받지 못할 것 같다. 내 팔로워들이 떠나가지 않으려면 계속해서 멋진 라이프스토리를 만들어내야 한다. 결국 누군가를 통해 나의 효능감과 일상의 질을 높이기 위한 행동이, 꾸며진 모습일 때에만 사랑을 받는 아이러니를 낳는다. 우리는 그렇게 꾸며진 자신에게 길들여진다.


인간에게 사랑을 받는 일은 필수다. 인정하기 싫지만, 살기 위해서는 타인의 사랑이 필요하다. 평생 스스로에게 사랑을 주는 것으로 결핍이 채워지는 나르시시즘은-평생의 사랑도, 결핍의 한계도 없기 때문에-없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사물이든, 우리는 무언가로부터 반드시 사랑을 얻고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갖는다. 하지만 이 정도로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오는 사랑에 목말라 한 시대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별나다. 웹 콘텐츠와 소셜네트워킹 앱은 점점 다양한 방식의 '교제'를 생산해내고, 소비하도록 한다.

 

결국 이 정도로 누군가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필요로 하고, 누군가에게 관심을 표현하고자 노력하는 이유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는 원초적인 감각이 괴이하게 진화했기 때문은 아닐까. 1인 가구의 급증은 취업, 이주, 생계, 학업, 가정불화 등 다양한 이유에서지만, 기실 '더 나은 삶'을 위한 선택에서다. 잘 살기 위해 혼자가 되지만, 마찬가지의 이유로 우리는 타인을 찾는다. 함께 생존하기도 어렵지만, 혼자서는 더욱 어렵다. 더 나은 삶을 살아야만 생존하는 시대에 우리는 놓여있다. 그러기 위해, 여러 선택지를 고려해놓아야 한다. 이를테면 에어백 같은.


그리고 그 중심엔 타인이 있다. 나의 사회적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타인, 나의 밥벌이에 직·간접적 도움이 될 수 있는 타인, 나의 경제적 형편에 언젠가 도움이 될 타인, 나의 심리적 우월감에 유익한 열등한 타인, 인생의 롤모델로 삼고 싶은 타인, 나의 경쟁심을 자극하는 우월한 타인이. 그리고 그 중, 나와 비슷한 위치에서 출발했으나 나보다 훨씬 값진 성과를 이루어낸 타인은, 단지 게시글 하나로, 얼마든지, 언제든지, 내 일상과 나를 하잘것없게 만들 수 있다. 지금의 젊은 날은, 마치 내 삶이 아닌 타인의 삶 같다.


그렇기에, 건강한 나르시시즘이 필요하다. 팔로워가 줄고, 누구도 내 근황을 궁금해하지 않고, 내 외면 또는 일상에 관심을 가졌던 이들이 하나 둘 떠나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해도,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의 빈도, 나와의 교제가 압도적으로 일상을 점유해야 한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어린 시절부터 학교, 학원에서 친구에게 경쟁심과 우정의 감정을 동시에 경험하며 성장했다. 그래서 익숙하지만, 그것이 주는 고통엔 익숙하지 않다. 나이를 먹고 사회에 나오면,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이들과 끊임없이 비교되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살아있는 생물은, 심지어 바이러스조차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방어능력은 생물의 생존에 필수적 요소다. 다른 이가 아닌 자신의 심리와 재능과 관심사를 궁금해하고, 자신의 심적·신체적 건강 상태에 귀를 기울이며, 양질의 음식을 스스로에게 먹일 권리가 있다. 나에게 쌀알 한 톨 만큼의 상처를 주는 이가 있다면 단호하게 내치는 건, 그래서 정당하다. 나보다 부모를, 나보다 내 자녀와 형제와 배우자를 우선 순위에 두는 것보다, 나를 우선순위에 두었을 때 삶의 행복은 배가 된다. 작금의 시대에, 나를 지키는 것,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을 끊는 것은 어쩌면 타인과의 깊이 없는 사교 행위를 끊는 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타인의 일상이 나의 일상보다 우위를 선점하도록, 나의 일상에 다른 누군가의 일상이 그늘을 드리우도록 방치하는 것은, 나의 생존에 해롭다.


책 『인간의 모든 동기』(최현석, 서해문집, 2014)에서는  '자존감이 강한 사람은 자신의 강점과 재능에 집중하는 반면,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약점과 결점에 집중'함을 이야기한다. 남과 비교해 자신의 못난 구석을 샅샅이 헤집을 필요는 없다. 자신이 가치 있다는 느낌을 추구하기 위해, 일상의 방향성이 자신이 가진 이로운 점들에 집중할 수 있는 루틴을 만들어야 한다. 그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힘을 가졌고 무엇을 극복해온 사람인지 인지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명상이 될 수도, 산책 등 가벼운 운동이 될 수도, 차를 마시거나 색연필을 들고 컬러링을 하거나, 일기를 쓰거나 지난 추억이 담긴 사진앨범을 보는 것이 될 수 있다. 요점은 방향성이다. 힘의 방향이, 나에게 향해야 한다.


그러니 선행되어야 할 것은, 우선, 타인이라는 지옥으로부터 도망치는 일이다. 실제가 아닌 스스로 만들어낸 관념의 지옥이라 해도, 벗어나는 것이 이롭다. 한 번 사는 생, 자신과 절교하는 삶을 살 순 없다. 태어난 김에 산다는 유행어가 있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지만, 다소 진지한 어조로 말하자면, 홧김에 태어나는 사람은 기실 아무도 없다. 태어나는 일 자체가 누군가의 긴 긴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면, 사는 일은 온전히 나의 노력으로 이어져야 한다. 살기 위해, 타인은 때로 조금도 필요치 않다. 살기 위해, 오직 자신만이 필요한 때가 분명, 우리 삶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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