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원 어치의 헛소리
혹은 두 시간 동안의 현자 타임
내 인생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 불현듯 깨달았다. 슈퍼에서 충동구매한 머루주 한 병과 맥주 두 캔으로 통찰의 눈을 얻었달까. 효력이 몇 시간밖에 가지 않겠지만, 그 힘을 더 얻고자 하는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알코올 중독자가 되는 첫걸음을 떼는 것이니 그냥 지금 이 순간 현자가 된 기분을 맘껏 누리기로 한다.
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이 항상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몇 년쯤 먼저, 혹은 십 년쯤 뒤에야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항상 때를 놓치는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난 언제나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늦었다.
어떠한 때로부터 조금 이르게 무언가를 예측하고 본질을 파악했다면? 현명하다고 할 수 있겠지. 운이 좋다면 예언가 대접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십 년쯤 빠르게 그에 대비하고 있다면? 그건 그냥 또라이다.
늦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때가 지나간 후에 '그때 이렇게 했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후회이다. 후회란 가슴 쓰라린 감정이고,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 다른 이들의 동정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런데 십 년이나 지나서 '아, 그때 내가 잘못 생각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어디가 좀 모자란 거다. 그리고 이런 건 남의 공감도 얻지 못하고 비웃음만 사게 마련이다.
되돌아보니 난 거의 평생을 또라이 짓 내지는 덜떨어진 행동만 하고 살았다. 이럴 거면 차라리 착각이나 오판 속에서 사는 게 좋을 텐데. 그때 내가 옳았다고 굳게 믿고, 내가 지금 하는 행동이 곧 다가올 미래를 위한 것이라고 확신을 가진다면 실제로야 어떻든 간에 정신건강에는 도움이 될 텐데 말이다.
이거야 원 현실은 현실대로 시궁창이면서 자책만 하게 되니, 정신건강에 해롭지 않느냔 말이다.
그리스 사람들이 행복한 이유는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라던데, 좀 경박하게 바꿔 말하면 탓을 해도 뭐라고 하지 않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내면을 돌보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뜻이 아닐까. 그럼 나도 이제 만만한 존재 하나 골라잡아 내 인생에 대한 책임을 죄다 떠넘겨 버려야지 싶은데 그게 또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신 탓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신을 믿기 때문이다. 믿음에도 상호 등가교환 법칙이 존재하는 거니까. 나한테 종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그에 따른 행위를 하지 않았던 그 알량한 믿음에는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해도 될 만큼의 가치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처님은 '탓'을 하기에 적당한 존재는 아닌 것 같다. 다른 신도 다 그렇다고 반박한다면야 뭐 할 말 없지만, 일단 내게는 부처님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그렇다는 말이다. 뭐랄까, 그분은 좀... 그렇잖아.
그래서 말인데, 종교를 바꾸면 내 인생이 좀 편해질라나? 아니, 종교를 바꿀게 아니라 새로 받아들여서 둘 다 믿으면 안 되나? 그리스 신들은 그런 것쯤 상관없다고 아량을 베푸시려나? 일단 부처님은 자신만 믿지 않으면 안 된다며 뭐라고 하실 것 같진 않은데. ('내' 부처님은 그렇다는 말이다)
난 언제나 이공계의 사람들을 부러워해 왔으니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를 내 신으로 삼아 일이 꼬일 때마다 득달같이 찾아서 책임지라고 어깃장을 놓으면 내가 좀 더 행복해질까?
그게 답이 아니라는 건 취해서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도 잘 알겠다. 그리고 왠지 그리스 신들을 함부로 갖다 붙이면 안 될 것 같아. 그분들은 좀 기분파들이시니까. 자기 믿는다고 막 퍼주고 그러다가도 기분이 나쁘면 번개 같은 것도 막 먹이던데. 공돌이 신께서 망치로 내 머리통을 깨부수려 들면 어떡해.
불쌍한 내 인생을 어쩐다. 항상 때를 못 맞추고 헛다리만 짚는데, 탓을 할 상대도 없고, 거기에 잠시 동안 헛소리를 지껄인 대가로 숙취까지 얻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