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나치고 있었다
종로의 초겨울 공기는 차갑다
그 날 무슨 얘기를 했던가
실없는 농담과 팔짱, 그 사람은 내 얼굴을 살살 만진다 웃는다
나는 그 반듯한 옆모습을 본다 품에 파고들지 않고서는 못 견디게 했던 그의 실루엣을 누린다
그리고 함께 맞이한 아침
테슬라 스크린에는 이보람의 <처음 그 자리에>
우리는 광화문을 지나친다
그 사람의 일터
그 사람이 일군 공간
푸들이나 비숑같은 강아지를 두 마리씩 데리고 피부에선 광이 나고 선글라스를 낀 채 비싸보이는 츄리닝을 입은 삼십 대 초반 여자들과
어딘가 성형한 티는 나지만 깔끔하고 세련됐고 도시적인 이미지의 예쁜 여자들.
모두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로 둘러싸인 여자들로 가득 찼던 그 공간.
꼭 새 것 같은 디자이너 백과 패셔너블한 코트를 입고 손톱은 네일아트로 반짝거리고 유명한 향수 브랜드의 탑노트가 풍긴다
화장은 한 치 오차도 없이 완벽하고 얼굴에 잘못된 각도라고는 없다
그 사이에 낀 나는 꼭 잘못 맞춘 퍼즐같았다
그들의 다정한 대화를 엿들으며 어색하게 할 일을 한다
나는 세련되게 말하는 법을 모른다
그래서 그 사람의 얼굴만 보면 웃곤 했지
좋으면 좋다고 했지
싫은 적은 없었어서 싫다고 한 적은 없지
손님들은 그의 향수 취향을 묻는다
와인 글라스와 유리병에 꽂힌 꽃의 조합에 감탄한다
그들은 사랑을 해 본 적 있는 사람들이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시간의 공백.
그들은 와인 글라스에도, 전등 스위치에도, 문 손잡이에도 취향이 있다.
구석에서 노트북을 붙들고 과제를 제출하는 스스로가 왜 이렇게 촌스럽고 초라한지…
나다울 수 있는게 사랑이랬는데 자꾸 작아지는 나는 그 사람이 원망스럽다
그 사람은 이윽고 커피를 내린다
라떼 아트를 그린다
섬세한 하트 두 개
함께 일하는 친구들과 웃는다
농담을 한다
퇴근 후 소주를 마신다
지난 사랑에 가슴 아파한다
그래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만
그 어떠한 것도 그 사람의 삶을 더 이상 흔들 수 없었다
그 날 그의 눈동자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는 그렇게 어느 길목의 횡단보도를 건너듯이
나를 지나치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가끔은 웃고
가끔은 한숨을 쉬며
살아가고 있을 그 사람.
내가 아닌 다른 이를 맞은편에 두고 밥을 먹고 술잔을 기울이고
언젠가는 누군가를 집에 초대할 그 사람.
그렇게 어떤 이를 알아가고
나랑은 못했던 사랑을 할 사람.
나에게는
사랑보다 이별로 기억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