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부에 있어서 애매한 재능을 가졌다. 카이스트에서 평균 정도 할 실력은 되지만, 결코 4점대 학점을 받을 말한 재능은 없다. 주변을 둘러보면, 나보다 뛰어난 재능을 갖춘 친구들도, 나보다 더 열심히 한다. 나는 그 친구들을 보면서 자극을 받아 열심히 해보려고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이 너무 많아서, 열심히 하는 것 자체에도 한계를 느낀다. 어떤 친구들은 공부를 거의 하지 않고 나보다 더 좋은 성적을 얻었으며, 나보다 공부를 더 많이 한 친구들은 내가 넘을 수 없는 벽이 돼버렸다. 차라리 아예 공부를 못하면 다른 길을 찾아보겠지만, 애매한 재능을 갖고 있기에, 나에게 공부는 완전히 놓을 수도, 그렇다고 확실히 잡을 수도 없는 계륵이다. 이 애매한 재능을 나는 저주라고 생각했다.
나는 학교에 들어오기 전부터 물리학을 전공하고 싶었다. 세상을 물리학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물리에 대한 재능이 없었다. 같은 문제를 풀어도 남들보다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공부에 대한 애매한 재능이 물리학과에 가면 최악의 재능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차마 물리학과를 선택할 수 없었다. 물리학과로부터의 도피처로 나는 카이스트 모든 학과 중에 사람이 제일 적은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를 선택했다. 21학번에 나 포함 4명밖에 없기 때문에, 꼴등을 해도 한 손안에 든다는 것이 정말 매력적이었고, 이런 애매한 재능도 쓰일 곳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 원자력및양자공학과에 들어가서 수강한 수업들은 즐거웠다. 수업을 듣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에, 굳이 주변 사람들과 내 성적을 비교할 필요도 없었다. 남들이 잘 알지 못하는 내용을 배우는 것도 나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어줬다. 시험 성적까지 잘 나오면서 나는 원자력및양자공학과에서 성공적인 첫 학기를 보냈다. 하지만 두 번째 학기에 들어오면서 내가 아직 물리학과에 미련이 남았다는 게 느껴졌다. 원자력및양자공학과 수업들보다 주변 물리학과 친구들의 수업 이야기들에 더 관심이 갔다. 복잡한 원자로 설계보다 입자의 운동에 대해 배우는 것이 더 재밌었다. 나 자신의 의견과 취향을 무시하고 물리학과를 피해 도망친 곳에서 공부하는 느낌이 들었다. 원자력 분야에 관심이 없으니까, 수업 시간에 제대로 집중하기도 어려웠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처럼, 원자력및양자공학과는 내가 원하는 낙원이 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물리학과를 선택하는 것은 내 학점에 몹쓸 짓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 같은 애매한 재능은 물리학과에 어울리지 않았다. 물리학과에 있는 괴물들과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도 물리학의 길은 내가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처럼 느껴졌다. 시도해 보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일단 도전해 보자는 마음을 갖고 물리학과 복수전공을 신청했다. 도전해 보고 아니다 싶으면 바로 취소하면 되니까, 물리학과 수업 몇 개만 들어보자고 나 자신을 설득했다.
복수전공 신청하고 첫 학기에 고전역학 수업과 전자기학 수업을 수강했다. 매 수업마다 물리한테 쳐맞는 느낌을 받았다. 매일 ‘다운’될 것 같은 상태로 간신히 버텼다. 부족한 맷집을 채우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복습했다. 그럼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주변의 괴물들을 보니, 내 맷집이 얼마나 부족한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물리학과 스터디에서 만난 친구들이 하는 말은 이해조차 어려웠다. 내가 질문하는 문제는 친구들이 답할 수 있었지만, 그 친구들이 하는 질문에 내가 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분명 천천히 포기하지 않고 계속 공부하다 보면 나도 물리를 잘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갖고 물리학과에 진입했다. 하지만 같이 공부하는 물리학과 친구들보다 내가 무능력해 보이는 상황이 계속되니 포기하고 싶었다. 인터넷 강의를 다 뒤져야 간신히 과제 한 문제를 푸는 내 애매한 재능을 원망했다. 원망은 분노가 됐고, 분노는 오기를 만들었다.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너무 싫어서 공부했다.
기말고사 기간에는 거의 매일 10시간씩 물리 공부를 했다.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고 시험을 보러 갔는데,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내가 풀 수 없는 문제들이 꽤 많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의 답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막힘없이 문제를 풀어나가는 친구들이 보였고, 나는 체념하고 내가 풀 수 있는 문제들만 풀고 빨리 제출하고 나왔다. 허무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시험을 망쳤다는 생각에 좌절했다. 내 한계를 인정하고, 다른 길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물리학과의 길을 포기한 채, 종강의 기쁨을 누렸다. 어쨌든 시험은 끝났기 때문에 행복하게 아무 걱정 없이 놀았다. 그러다가 아무 기대 없이 전자기학 기말고사 성적을 봤는데 평균 이상이었다. 70명 정도 듣는 수업에서 30등 정도 했다. 처음으로 물리에게 잽을 날려서 반격에 성공했다. 애매한 재능으로 애매하지 않은 위치까지 올라갔다. 내가 항상 얽매였던 ‘재능’이라는 것은 딱 이 정도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던 것이었다. 물론 재능이 풍부했다면 훨씬 쉽게 이 위치까지 올 수 있었겠지만, 딱 이 정도의 노력으로 애매함을 극복할 수 있었다.
애매한 재능은 저주가 맞다. 어떤 길을 선택해도 이 길이 옳은 길이라는 확신이 안 선다. 평생 자신의 진로에 대해서 고민하고, 계획을 수정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 애매한 재능을 갖고 포기만 안 한다면, 그리고 충분한 노력을 넣는다면, 애매하지 않은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길에 지나가는 한 사람이 내가 생각한 애매한 재능을 최고로 쳐줄 때가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