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받는

by 카북이

침대에 누워서 어릴 때의 기억을 떠올려봤다.

엄마 립스틱 내 입술에 떡칠한 기억,

유아 스포츠단에서 방과 후에 축구한 기억,

만리장성 갔다가 너무 추워서 주차장에서 안성탕면 먹방한 기억,

빨리 나가서 축구하고 싶어서, 수학 학습지 답지 베껴서 엄마한테 보여준 기억.

서서히 멀어져 가는 뉴런들의 거리가 다시 좁혀지는 느낌을 받았다.


현재 나는 카이스트 물리학과에 진학해서 공부를 하고 있지만, 물리를 특별히 잘하지도, 다른 공부를 특별히 잘하지도 않는다. 자연을 알아간다는 점에서 물리가 정말 재밌지만, 다른 물리학과 학생들에 비해 물리를 정말 더럽게도 못한다. 그래서 내 진로에 대해서 계속 의문이 든다. 이 선택이 정말 옳은 선택인지, 나는 돈도 많이 벌고 싶은데, 물리학과를 졸업했을 때 돈을 많이 벌 수 있을지, 끊임없는 의문이 나를 자꾸 불안하게 만든다. 차라리 내가 물리를 잘했더라면 크게 걱정이 없었을 텐데..


사실 어릴 때의 기억을 떠올려본 이유는 유튜브에 나온 한 강연 영상 때문이었다. 진로와 적성에 대해 계속 찾아보던 중,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어릴 때의 경험을 잘 살펴봐야 한다는 강사의 말을 듣고 내가 한 경험들에 대해 쭉 생각해 봤다. 강사의 말에 따르면, 바다를 그냥 좋아하는 사람은 없고, 바다에 대한 어릴 때의 좋은 경험이 바다를 좋아하게 만든다. 나는 어쨌든 이공계 쪽 진로를 선택하려고 생각 중이기 때문에 어릴 적 공부 관련 경험의 기억을 떠올리려고 노력해 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공부 관련 기억은 잘 없다. 나는 공부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도 아니다). 놀러 나가기 위해서는 꼭 수학 학습지 2장을 먼저 풀어야 한다는 엄마의 원칙이 있었고, 나는 어떻게든 엄마가 숨겨둔 답지를 찾아서 답을 베끼고 빠르게 축구를 하러 나가는 아이였다. 심지어 수학 과외를 받을 때도, 화장실에서 답지를 베낀 기억이 있다. 세상에는 공부보다 재밌는 것이 너무 많았고, 나는 항상 재미를 택했다. 맨날 나가서 축구만 하고, 친구들이랑 자전거 타고 동네를 정복하는 그런 아이였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중고등학교 때 공부를 잘해서 카이스트를 갔다는 것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쉽게 믿지 못한다. 축구 실력으로는 항상 인정을 받는 편이었지만, 공부로는 인정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심지어 내가 공부를 잘하던 고등학교 때를 돌아봐도, 나보다 공부를 잘하는 한 명이 있었기에, 그 친구가 나의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가져갔었다. 카이스트 합격하고 엄마한테 듣기론, 할머니는 공부는 전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 나를 포항공고를 보내서 빨리 공장에 취업을 시키려고 하셨다고 한다. 나의 성공적인 입시는 의심 반 인정 반의 시선을 받아야 했다.


억울하지는 않지만,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게 무의식적으로 계속 신경 쓰이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자꾸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나를 힘들게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좋은 물리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잘해야 한다는 마인드를 버려야 한다. 자연을 더 알고 싶다는 궁금증과 호기심이 노력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게 잘 안 되는 것 같다. 자연을 알아가는 게 재밌어서 물리를 선택했지만, 자꾸 동기들의 수준이 나보다 높아 보이니까, 물리가 재미가 없어진다. 나 스스로가 초라해 보이기도 한다. 계속 남들한테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가 내 콤플렉스가 돼버린다... 앞으로 최소 한 번은 나 스스로에게 물리 실력을 증명해야 할 것 같다. 그래야만 물리공부를 지적 호기심을 갖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릴 때 주변의 인정을 받은 분야를 선택하는 것은 꽤 중요한 것 같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각보다 살면서 중요하다고 느껴진다. 가능하면 내 실력이 많이 인정 받은 진로를 선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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