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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대 Jun 01. 2024

감정의 깊이

임팔라에게 초원은 너무나도 넓다

호모사피엔스부터 지금의 인류까지 이토록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언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여 소통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가장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지식의 전이를 통한 축적과 의사소통을 통한 집단 지성은 우리를 지구상 가장 똑똑한 존재로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나는 이토록 대단한 능력을 가진 인간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언어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내가 내뱉는 '슬픔'과 타인이 내뱉는 '슬픔'의 깊이가 과연 같을 수 있을까? 사람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그 감정을 대처하는 방식이 다르기에 그 깊이는 천차만별일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타인의 감정의 깊이를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하며, 타인이 자신의 감정을 전부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단상의 시작은 두 번째 출근 날이었다.


뒤처지기 싫다는 조급함은 이른 새벽 나를 깨웠다. 좁디좁은 침대에서 뒤척일 바에는 일찍 출근하는 게 낫다는 생각에 고시원을 나섰다. 나의 마음을 알아주었던 걸까. 감사하게도 앞번 선배 간호사가 일찍 온 나를 위해 오늘 필요한 업무를 알려주었다. 선배와 함께 필요한 약들을 준비하고 있는데 밖이 너무나도 소란스러웠다. 약 이름도 아직 외우지 못한 나는 집중하지 않으면 실수를 할 것 같았기에 청각이 아닌 시각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란은 점점 더 커지더니 욕설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 선배 간호사와 나는 처치실 밖으로 나갔다. 그 순간 젊고 키가 큰 남자 한 명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는 다짜고짜 우리에게 의료인이 폭행당했으니 경찰에 신고하라고 했다. 그랬다 그는 당직의사였고, 여기서 의료인은 본인을 뜻 했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엘리베이터 고장으로 지하 조리실에서 위층으로 올라가야 할 식이가 그 중간층인 우리 층에 몰려버렸다.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우리 층 엘리베이터 앞은 시장통 그 자체였다. 위층 간병사들이 내려와 식이를 가져가는 과정이 너무나도 소란스러웠다. 그런데 문제는 당직실이 엘레베이터 옆에 위치해 있었다. 당직의사였던 그는 자신의 수면을 위해 밖으로 나와 조용히 해달라고 말했다. 너무나 당연한 요구였다. 쉬어야할 권리를 침해 당하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하지만 같은 말이라도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듣는 사람의 기분은 천차만별이다. 그의 말엔 약간의 감정이 섞여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언짢았던 간병사는 그 말에 대꾸를 했다. 결국 서로 목소리가 커졌고, 의사가 먼저 욕설을 했다고 한다. 그 말에 간병사 또한 욕설로 받아쳤고, 서로의 감정은 격해지다가 간병사가 의사의 입을 막으려고 얼굴에 손을 댔다는 게 두 사람의 주장이었다. 선배와 나는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다 큰 어른이 싸우고 와서 우리에게 경찰에 신고하라는 말을 들었으니 말이다. 선배는 우리는 목격하지 못했던 점, 간병사가 우리 층 간병사도 아니기에 자신이 나서기에는 무리라는 점, 과장님이 출근할 때까지 기다려서 해결하는 게 좋겠다고 그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우리는 알지 못했다. 그의 분노의 깊이를. 그는 엘리베이터 앞이지만 엄격히 중환자실에서 일어난 일인데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을 했다. 간호사들이 폭행을 당했다면 똑같이 행동할 것이냐며 물었다. 우리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분노였을까? 아니면 예상치 못한 우리의 반응에 서운했던 것일까? 침묵을 깨고 그는 다시 한마디 꺼냈다. '라운딩 가시죠 그럼' 환자를 보러 가자는 '라운딩' 그 단어에 소름이 돋은건 처음이었다. 중환자실 환자들부터 8층까지 모든 환자를 보겠다 했다. 꼬투리 하나 잡아 면박을 주려는 의도가 너무나도 뻔했다. '이렇게 까지 해야 할까요?' 선배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리자 그는 더욱 조여오기 시작했다. '지금 의사 지시 거부하는 겁니까?' 그는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 동영상 촬영을 시작했다. 카메라 렌즈가 그렇게 뾰족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본인 이름이랑 소속 말하세요. 의사 지시 거부로 보건소 신고할 거니깐' 선배의 눈동자와 목소리는 한 없이 떨렸다. '그럼 인수인계하고 가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절대 지지 않았다. '아니오 지금 가세요.' 선배는 어쩔 수 없이 첫 번째 베드로 발을 옮겼다. 별거 아닌 지적을 받으며 6명의 환자가 지나갔다. 그는 싫증이 났던 걸까? 아니면 자신의 욕구가 총족되서어였을까? '오늘은 이쯤만 해드릴게요.' 그 순간 마스크 속 그의 입꼬리는 어땠을까. 그 깊이는 굳이 알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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