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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대 May 26. 2024

첫 출근날 입사 동기가 도망갔습니다.

적응하는 동물

 첫날부터 이른 시간에 출근하는 것만큼 곤욕이 없다. 어색한 인사와 소개, 정자세로 앉아 누군가 나에게 뭔가를 시켜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1초가 10초 같은 하염없는 기다림. 이 곳에 블랙홀이 있는건 아닌지, 공간과 시간의 방을 체험할 수 있다. 이런 불상사를 겪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병원 주변을 서성이며 시간을 때우다 10분쯤 남았을 때 건물로 들어섰다. 면접 날 안내받은 장소는 8층에 위치해 있었다. 긴장한 채로 문을 열자 나의 면접을 봤던 부장님,  그리고 50대로 보이는 여성 한분이 계셨다. 그분은 나와 같은 병동에 일하게 될 간호조무사였다. 시작을 같이 할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 만큼 큰 힘이 되는 일은 없었다. 잠시 후 간호부장님이 들어왔다.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고 유니폼을 받았다. 유니폼 택에는 생전 처음 보는 알파벳이 적혀있었다. XXL 살아생전 M사이즈 밖에 입어 본 적이 없었다. 상의는 오버핏이 유행이니 트렌디하고 좋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문제는 하의였다. 두 번 접어야 허리에 겨우 맞았다. 일하다가 바지가 흘러내리는 불상사를 겪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처음 요양병원을 경험하는 사람이 이러한 대우를 받았다면 바로 퇴사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유니폼은 주지 않고, 교육도 없이 첫날 혼자 근무를 시켰으며, 상사도 없이 일을 해야 했고, 사망선고까지 간호사인 나보고 하라 했던 곳에서 일을 했던 사람. 간호계의 구정물 그 자체를 경험하고 왔던 사람 아니던가. 그곳을 생각하면 유니폼이라도 주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고 일을 해야 한다. 근무복으로 갈아입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내가 일할 곳은 어떤 곳일까? 같이 일할 사람들은 어떨까?  셀렘과 긴장이 공존하는 마음이었다. 문이 열리자 그곳에는 3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중 나에게 일을 가르쳐 줄 사람은 젊은 여자 선생님이었다. 혹시 태움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무색하게 너무나도 친절했다. 오더를 받는 방법부터 투약, 기록까지 그리고 환자마다 히스토리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고, 별거 아닌 일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전 병원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소속감을 느끼자 잘 해내고 싶다는 열정이 생겼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트레이닝을 받고 있을 때 점심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나와 같이 출근한 간호조무사 선생님이 보이지 않았다. 다들 그 선생님을 찾아다녔다. 내가 탈의실에 들어갔을 때 오늘 받은 유니폼이 곱게 개어져있었다. 그 후 수선생님께 문자가 한통 왔다고 한다. '병원이 너무 열악하네요.' 그녀는 그 후 돌아오지 않았다. 그제야 열악한 주변 환경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중환자실은 와상환자가 대부분이었다. 와상환자와 욕창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바늘과 실 같은 존재이다. 매일매일 드레싱을 교환해 주어야 한다욕창에서 흘러나오는 살 썩는 냄새와 대소변 조절이 안 되는 환자들로 인해 병실은 습하면서도 구역질 나는 심한 악취가 진동을 했다. 그 보다 큰 문제는 '옴'이었다. 환자들 피부에 올라온 빨간 반점이 피부병 혹은 점상출혈이라 생각했다. 그건 옴에 물린 자국이라고 했다. 2024년도에 옴이라니. 상상도 못 한 존재에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물 불 가릴 상황이 아니다. 여기서 그만둔다면 방법이 없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지 않는가. 환경은 적응이 되기 마련이고, 감각은 무뎌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나는 동기와 함께 도망가는 것보다는 이곳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 언젠가 이곳의 경험 또한 나의 피와 살이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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