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을 읽으려 덤벼들 때면 시간 속에 축적되어있는 두꺼운 의미의 층을 이해하기가 너무도 어렵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래서 해설서에 기대어 고전의 문맥을 따라 나아갑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도 이와 같은 책 중 단연 앞자리를 차지하는 책일 것입니다.
고병권 선생은 자본론(1권)에 대한 단단한 해설서를 총 12권으로 내놓았습니다. 자본론에 대한 해설서는 김수행 교수에서 데이비드 하비까지 좋은 해설서가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고병권 선생의 해설서만큼 당대 마르크스의 심장을 느끼게 할 뿐 아니라 텍스트 전체를 한 문장도 남김없이 꼼꼼히(?) 해설해주는 책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고병권의 자본론 해설서인 “북클럽 자본 시리즈- 천년의 상상”은 “1권 : 다시 자본을 읽자, 2권 : 마르크스의 특별한 눈, 3권 : 공동체가 끝나는 곳에서 화폐가 시작되었다”에서 “11권 : 부의 축적과 빈곤의 축적, 12권 : 피와 불의 문자로 기록된 연대기” 등의 제목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각 책의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북클럽 자본 시리즈”는 자본론 본 장의 제목을 그대도 따르기보다는 각 장의 내용이 담고 있는 의미를 살려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북클럽 자본 시리즈” 의 미덕은 촘촘한 해설에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평가는 아마도 자본론을 읽으면서 문장과 문장에서 헤매다 길을 잃은 경험이 너무나 깊게 남아는 개인적 경험 때문인 듯합니다. “북클럽 자본 시리즈”는 문단을 건널 때마다 그 사이에서 넘어지지 않고 무사히 건너도록 두 손을 꼭 잡아주려 만든 책이라는 생각이 1권에서 12권까지 읽으며 매 순간 들었던 책입니다.
1권을 간략하게 정리해보았습니다.
제1권 “다시 자본을 읽자”
고병권 선생의 자본론 해설서인 “북클럽 자본 시리즈” 12권 중 들어가는 마당인 제1권을 중심으로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시리즈 제1권의 표제는 “다시 자본을 읽자”입니다. 1권은 자본론에 대하여 본격적인 해설로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1권 “다시 자본을 읽자”는 ①책을 읽는다는 것에 대하여 ②정치경제학이란 무엇인가와 ③그에 대한 비판 ④비판으로서 정치경제학의 역사성 ⑤ 정치경제학의 당파성 ⑥자본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① 저자는 가장 먼저,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지, 공부란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질문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어떤 매혹 때문에 걸어 들어가는, 아니 걸어 들어가는 건지 끌려 들어가는 건지 알 수 없는, 그런 독서가 있습니다. 마르크스와 ‘자본’은 내게 그런 독서의 상징입니다. 지식의 습득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주체의 변형에 대한 예감 속에서 이루어지는 독서 말입니다.”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에서 “진실의 역사에서 근대 시기는 오로지 인식만이 진실의 접근을 허용하는 것이 되는 순간에 시작”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서양 고대의 철학자들은 주체의 자기 변형의 과정이 있어야 만이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주체의 존재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정화, 자기 수련, 포기 시선의 변화, 생활의 변화 등과 같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옛 철학자처럼 고병권 선생도 “책에서 아무런 마력도 기대할 수 없는 권태로운 독서”를 하는 사람들에게 “주체 변형의 위험과 매력이 공존하는” 책 읽기를 위하여 “북클럽 자본 시리즈”를 썼다고 생각합니다. “북클럽 자본 시리즈”는 독서를 통해 자기 변형의 과정을 가져오고 변형된 주체는 진실에 한 걸음 더 접근하게 하기 위한 책입니다.
② 고대 그리스에서 “오이코스는 사적 영역으로, 생명 유지를 위해 필요한 생계의 영역이며” “폴리스는 공론의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치경제학’이라는 말은 이 둘을 연결한 겁니다.” 정치경제학은 생계를 위해 물품을 생산하는 경제(오이코스-필연)와 상품 생산을 위해 물건을 만드는 경제(폴리스-자유)가 상호 침투한 경제에 대한 학문입니다.
근대 경제학(정치경제학)의 창시자인 아담 스미스는 그의 책 국부론에서 분업의 결과로 각종 생산물이 많아지면 최하층 국민까지도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국민의 부를 주장했던 정치경제학자들은 당혹스러운 현실과 대변하게 됩니다. 바로 ‘국민의 부’만큼이나 ‘국민의 가난’이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죠. 영국의 정치가이자 소설가인 벤저민 디즈 레일로의 소설 제목을 따서 말하자면 ‘두 개의 국민’이 생겨났습니다.
국민은 만들어지자마자 둘로 갈라졌습니다. 인구의 계급적 분화가 나타난 것이죠. 사람들은 전대미문의 부와 전대미문의 빈곤이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걸 직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정치경제학의 시야로 바라본 아담 스미스마저 부유한 사회의 원리가 빈곤한 사회의 원리이기도 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이런 현상에 대하여 빈곤은 자연현상이라는 결론으로 바라보기까지 합니다.
③ “마르크스의 비판은 정치경제학의 역사적 한계를 드러냅니다. 정치경제학은 영원한 과학이 아닙니다. 그것은 역사적 과학입니다. 그것은 특정한 사회적 조건들과 더불어 출현했고 그 조건들의 해체와 더불어 사라질 겁니다.”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정치경제학이 지탱하고 있는 그 근거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정치경제학이 보편적 진리가 아니라 역사성, 당파성을 가진 학문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④ “마르크스는 ‘2000년 이상’ 이어온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 사회의 ‘세포’라고 할 상품을 해명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필요한 물건들이 교환되는 장면을 눈앞에서 지켜본 것은 아주 오래되었지만 가치가 상품의 형태로 나타난 것에 대한 인식에는 도달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지성이 모자라서요?” 아닙니다. “이것은 천재성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성의 문제입니다. ‘동질화된 가치 공간’은 역사적 생산물입니다. 다시 말해 생산자들 사이에 동등성이 확보되어야 하고( 신분해방), 상이한 노동들이 동질적으로 보일 정도로 단순노동이 통계적으로 일반화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상품을 해명할 수 있는 추상력의 힘은 더 많은 천재성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⑤ 니체는 철학이 말하는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해당 철학을 추동했던 의지의 충동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읽는다는 것은 해당 진리를 지배하는 충동을 읽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진리를 추동하는 의지의 충동을 파악할 수 있을 때 그 진리의 실제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정치경제학은 특정한 시대에 ‘특정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지’의 의지의 충동으로 나타난 경제학입니다. “정치경제학이 과학으로 정립된 것은 부르주아지가 권력을 잡으면서입니다.” (권력을 잡은 부르주아 지는 정치경제학을 보편 진리를 가진 경제학이라 하였다.)
⑥ 우리는 보편적 진리에 도달하려는 독해가 아니라 새로운 독해, 다른 독해를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을 읽고 또 읽어야 합니다. 알튀세르는 거의 1세기 동안 자본을 읽어왔는데도 다시 읽어야 한다고, 열 번씩 다시 읽어야 하고, 프랑스어판으로도, 독일어판으로도 읽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구한 독해(lecture innocente)란 결코 존재하지 않기에 우리가 죄를 범한(coupables) 독해가 어떤 것인지를 말하자”. 보편적 진리를 찾는 독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리의 토대를 부수어 버리는 독해를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