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계하신 법정스님은 쌩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훑어 넘기신 것까지 합하면 수백 번 읽으셨다고 합니다. 가까운 친지들에게 “어린 왕자”를 서른 권도 넘게 사주셨고, 어린 왕자를 읽고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신뢰감과 친화력을 느끼신다고 하셨습니다. 법정스님은 자신에게 문자로 된 책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선뜻 “화엄경”과 함께 “어린 왕자”를 고르겠다고도 하셨고 “어린 왕자”에 긴 편지글을 쓰기도 하셨습니다.
어린 왕자!
지금 밖에서는 가랑잎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창호에 번지는 하오의 햇살이 지극히 선하다.
이런 시각에 나는 티 없이 맑은 네 목소리를 듣는다.
구슬 같은 눈매를 본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해 지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그 눈매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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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린 왕자"를 그렇게 많이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읽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생텍쥐페리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는 소설로 읽혀가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다음은 독서경험의 느낌을 간직하며 쌩텍쥐페리에게 보내는 편지 글입니다.
쌩텍쥐페리에게
1.
명확히 눈으로 보이고 수치로 평가받아야 하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것의 소중함을 간직하기 위한 당신의 모험 이야기를 잘 들었습니다. 당신처럼 우리도 열대의 사막으로 날아가 자아를 성숙시켜 나가는 모험을 해야 할 듯합니다. 당신은 측정되고 실증되는 것만을 믿고 사는 어른들의 세상에서 “그림물감 한 상자와 연필”을 간직하며 살았습니다. 저는 그것은 보아뱀 속에 있는 코끼리를 볼 수 있는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한 가혹한 삶의 투쟁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작은 별에서 하루에 마흔네 번의 노을을 보며, 새침데기 장미를 돌보며 지냈습니다. 장미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부지런히 바오밥나무의 싹을 뽑아주기도 하였고요. 하지만 어린 왕자 당신은 노을을 간직한 작은 별과 장미를 뒤로하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저는 작은 성취에 만족하여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몸에 익숙해진 것들을 떨쳐내고 새로운 모험을 시작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당신처럼 자아를 찾아 돌연한 길 떠남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거대한 용기를 가진 자 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권위에 물든 행성, 허영심의 행성, 우울함의 행성, 물신주의 행성, 수동적 삶의 행성이 잡아당기는 중력에 붙들려 있지 않았습니다. 익숙함의 자기장에서 당신은 쉼 없이 탈주했습니다.
2.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유명한 이론이 있습니다. 아들이 어머니를 좋아하자 아버지가 아들에게 거세의 위협을 가합니다. 아들은 거세를 당할 것이라는 공포를 이기지 못해 아버지의 질서에 순종하고 아버지가 되면서 갈등은 해결됩니다. 여기에서 아버지의 질서에 함께한다는 것은 세상이 만든 규율과 질서에 적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자본주의 욕망이 만들어 놓은 가치의 사다리만을 보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 대중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받아들이는 것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어린 왕자가 아버지의 질서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면 어떠한 모습을 보여주었을까요? 이는 여행하며 들렀던 별에서 만난 왕의 권위에 복종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으로 , 허영심에 빠져 찬양받는 삶을 동경하며 사는 것으로,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며 삶을 사는 모습으로 나타났을 것이고, 자기 변형 과정 없는 권태로운 독서를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 왕자는 관습의 중력장 안에서 멈추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보아뱀 뱃속의 코끼리를 볼 수 있는 눈을 간직한자는, “그림물감 한 상자와 연필”을 간직하며 살아온 자는 새롭게 긍정해야 할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 왕자는 세계의 구성원들이 서로가 서로를 길들이는 관계로 만들고, 그 관계의 망을 감각하며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어린 왕자는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 밖에 있는 존재입니다.
3.
어린 왕자는 마지막 기착지인 일곱 번째 별 지구에 도착합니다. 지구는 좀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면 너무도 찬란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찬란한 모습은 어린 왕자의 말처럼 “크게 무리 지어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오페라에서 보는 발레의 그것처럼 질서 정연한 것이었”습니다.
찬란한 지구별 어느 사막에서 어린 왕자는 밖에 있는 존재들과 관계를 맺으며 모험을 시작합니다. 어린 왕자는 여우에게 “관계를 맺는다”는 뜻을 가진 “길들임”에 대하여 배우게 됩니다. 여우는 길들여진 자가 오후 네시에 온다면 세시부터 벌써 행복해지기 위해 “의식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의식이란 네 번째 별에서 만난 사업가처럼 계산을 잘하는 의식이 아닙니다. 여우는 “어떤 날이 다른 날들과, 어떤 시간이 다른 시간들과 다르게 만드는 게 의식”이라고 알려줬습니다.
사업가의 의식은 각자가 간직한 질적인 차이의 소중함을 보지 못합니다. 사업가의 의식은 다름의 아름다움을 수량적으로 계산하여 사회가 만든 가치 순으로 순서를 매깁니다. 그러나 여우가 말한 의식이란 차이를 긍정하고 차이에 다가가서 들어주고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림물감 한 상자와 연필"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자는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여우를 만나 길들임이란 무엇인가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생텍쥐페리 당신이 내면 깊은 곳에서 만난 어린 왕자는 다시 한번 그 깊이의 더함을 위하여 한걸음 나아갑니다. 이전의 것에 죽음을 줄을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길을 다시 떠난 것이죠. 한 껍질을 벗기기 위해선 이전 것들은 죽음의 과정을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자아 여행은 멈춤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린 왕자는 뱀에게 물리어 죽음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뱀은 죽음과 소생의 상징입니다).
4.
당신은 여행길에 꽃, 메아리, 여우, 철도원과의 만남에서 자아의 깊이를 더해갔습니다. 마침내 시간이 되어 두껍게 내려앉은 허울의 몸을 벗어던지려는 마지막 선택은 놀라웠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당신은 뱀의 독에 물려 죽는 장면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죽음이 있었기에 당신은 당신의 작은 별로 갈 수 있었지요. 당신은 바오밥나무의 어린싹을 먹어 없앨 수 있는 양과 함께 작은 별로 돌아갑니다.
어린 왕자와 헤어진 지 육 년의 시간이 지나간 어느 날 생텍쥐페리 당신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래서 나는 밤이면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게 마치 오억 개나 되는 작은 방울들 같아서----” 당신은 이제 어른들이 만든 세상에 살아가면서도 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의 소리를 들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는 “그림물감 한 상자와 연필”을 간직하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막으로 여행과 뱀에게 기꺼이 자신의 몸을 맞긴 용기가 있었기에 가능하기도 했고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당신은 이제 “장미와 양의 모순”이 있는 삶을 충분히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린 왕자가 밥오밥나무에게서 작은 별을 지키기 위해 데려간 양은 당신의 장미를 먹어버리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바오밥나무의 어린 새싹은 장미의 어린싹과 구별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양과 장미가 함께 있는 세상에서 "그림물감 한 상자와 연필"을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 때로는 이런 생각도 한다. ‘그럴 리가 없지! 어린 왕자는 밤마다 꽃에 둥근 유리 덮개를 씌워주고 양이 못 덤비게 잘 보고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행복해진다. 그러면 모든 별들도 빙그레 웃는다.
또 때로는 이런 생각도 한다. ’어쩌다 한두 번은 방심할 수도 있어. 그러면 끝장인데! 어느 날 밤, 그가 둥근 유리 덮개를 씌우는 걸 잊어버렸거나 아니면 양이 밤중에 소리 없이 밖으로 나왔다면-----. 이러 생각이 들 때면 작은 방울들은 모두 눈물방울로 변하고 ----】
어른들의 세계에서 작은 별의 장미를 지키기 위하여 생각하고, 안타까워하고, 행복해하며, 눈물 흘리는 마음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당신의 이야기를 잘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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