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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재석 May 16. 2022

황무지 – T. S 엘리엇

버티며 살고 있는 그대에게 전해주는 시 

     


뮤지컬 '캣츠'의 원작은 T.S 엘리엇의 시이고 시의 제목은 “주머니쥐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지혜로운 고양이 이야기”이다. 하지만  T. S 엘리엇 하면 아마도 영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 중 하나인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라는 시구로 시작되는 시, “황무지”의 작가로 기억할 것이다. 



    


"황무지"가 출간될 무렵 T. S 엘리엇의 삶은 깊은 수렁에 빠져  있었다. 그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하버드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어 생활고에 시달렸으며, 아내 비비안 헤이우드의 신경증마저 악화되어 결혼생활은 파국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황무지”는 출판 연도가 1차 대전이 끝난 직후여서 그런지 전쟁을 불러온 문명과 인간성의 파탄을 묘사한 시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에 대해 엘리엇은 그의 시는 “단지 전적으로 무의미한 삶에 대한 개인적인 불평의 해소에 지나지 않으며, 그저 한 편의 리드미컬한 투덜거림에 불과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황무지"는 시인의 개인적 삶의 고뇌와 무의미함에 대한 불평이 동서고금의 문학, 철학, 신화와 결합하여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되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 노랫소리는 시대가 겪고 있는 아픔의 깊은 면을 들추어내며 인간의 보편적 감성을 자극한다. 보편적 감성이 동서고금의 고전이라는 현을 타고 울릴 때의 음조는 어지러울 정도의 현란함을 자랑한다. 그 현란한 소리를 지속적으로 듣다 보면 삶의 회의와 무의미함이 두껍게 내려 누르기에 인간이라면 찾을 수밖에 없는 궁극의 절실한 갈망의 음조임을 알게 된다.            


시(詩)의 제사(題辭) - (책의 첫머리에 책의 내용과 관련되어 쓰는 문장)     

“한 번은 쿠마에서 나도 그 무녀가 조롱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지요. 애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지요. ‘죽고 싶어.”     


시의 '제사'는 오비디우의 ’ 변신 이야기‘에 나오는 그리스 신화 중 한 장면을 인용하고 있다. 이탈리아 근처 쿠마라는 지역에 한 무녀가 살고 있었다. 아폴론 신은 그녀를 사랑하였기에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쿠마의 무녀는 아폴론 신 앞에 한 줌의 모래를 들고 와 모래의 개수만큼의 생명을 요구한다. 소원은 이루어져 모래 개수만큼의 생명을 얻었지만 무녀는 영원한 젊음을 말하지 못하는 실수를 했다. 이제 기나긴 세월이 흘러 무녀의 육체는 늙고 오그라들어 새장에 들어갈 만큼의 작고 추한 몸만이 남게 되었다.     

 

T. S 엘리엇은 시의 '제사'에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조롱 속 쿠마의 무녀와 동일화시켰다. 개인적 고뇌와 고통이 신화로 표현될 때 그 고뇌와 고통은 보편성을 얻게 되는 마법이 일어난다.  융은 신화란 “인간 정신의 원형의 발달과정을 설명해주는 상징적인 이야기”라고 말한다. 이는 다양한 문화마다 간직한 여러 형태의 신화는 결국 인류가 가지고 있는 태곳적 원형 이미지라는 것이다. 무의미한 삶에 대한 엘리엇의 불평은 신화 속 무녀의 삶에 내린 저주와 만나 인류 궁극의 문제로 노래되고 있다.           


인류 고전으로 콜라주 된 엘리엇의 투덜거림      


엘리엇의 "황무지"는 개인의 고뇌를 넘어 20세기 현대문명이 겪고 있는 인간들의 불안과 공허함을 들려준다. “강의 천막은 찢어졌다,/ 마지막 잎새의 손가락들이/ 젖은 둑을 움켜쥐며 가라앉는다./ 바람은 소리 없이 갈색 땅을 가로지른다./ 님프들이 떠나갔다./ -------- 명주 손수건도, 마분지 상자도 담배꽁초도/ 그 밖의 다른 여름밤의 증거품 아무것도 없다./ 님프들은 떠나갔다. --------- 레먼 호숫가에 앉아 나는 울었노라.” 템즈강 가를 짙푸르게 덥고 있던 나뭇잎이 떨어져(강의 천막은 찢어졌다) 마지막 잎새마저 강둑에서 바람에 날려 강으로 떨어져 갔다(마직막 잎새의 손가락들이 젖은 둑을 움켜쥐며 가라앉는다 - 생명이 움츠러드는 겨울이 다가왔다). 생명의 강가 님프마저 떠나고 시인은 강가에 앉아 울고 있다.       


20세기 레먼 호 숙가에 앉아 울고 있던 시인은 2000여 년을 훌쩍 거슬러 올라가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땀 젖은 얼굴들을 붉게 비춘 횃불이 있은 이래/ 동산에 서리처럼 하얀 침묵이 있은 이래/ 돌 많은 곳의 고뇌가 있은 이래/ 아우성 소리와 울음소리/ 옥과 궁궐/ 먼 산을 넘어오는 봄 천둥의 울림/ 살아 있던 그는 지금 죽었고/ 살아 있던 우리는 지금 죽어간다/ 약간씩 견디어 내면서.”--------“마른 풀잎 소리도 아닌/ 바위 위로 흐르는 물소리가 있다면/ 티티새가 소나무 숲에서 노래하는 곳/ 뚝뚝 똑똑 뚝뚝 또로록 또로록/ 하지만 물이 없다.”     


2000여 년 전 팔레스타인 지역은 아픔과 불안이 짙게 깔려있는 곳이었다. 거대 제국으로 발돋움하는 로마와 지역 통치자들의 지배욕 아래서 민중들은 처참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당시 종교는 고난 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보듬고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법 테두리 안에서 믿음을 재단하고 벌하는 권력 이데올로기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기대어 삶을 달랠 곳이 없었다. 팔레스타인 땅에 생명이 말라갈 무렵 ‘먼 산을 넘어오는 봄 천둥의 울림’처럼 새로운 삶에 대한 행동을 보여주는 자(예수)가 나타났다. 하지만 생명의 힘을 불어넣어주던 자를 지금은 찾을 수가 없다. 그리고 지금 살아가는 우리는 쿠마의 무녀처럼 견디어 내면서 겨우 살아가고 있다.    

 

실존의 삶이 고통의 진실성 앞에 놓였다면, 시인은 그 고통을 벗어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엘리엇은 1928년 어빙 배빗을 논하는 자리에서 ‘문명이 종교 없이 존재할 수 있을지 또 교회 없이 존재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고 말하여 기독교 없이 유럽 문명의 발전은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엘리엇은 동양의 종교인 불교나 힌두교에도 많은 관심을 보일 뿐 아니라 고대 신화도 자신의 글에 녹여놓으며 생명의 길을 모색한다. 특히나 부활의 원형적 신화인 식물 신화는 “황무지” 곳곳에서 볼 수가 있다.      


식물 신화란 식물재배를 하던 고대 문화권에서 발생한 신화를 말한다. 식물의 부산물로 생존을 이어가던 사람들은 식물들이 그 생을 마감하여도 땅에 묻힌 씨에서 다시 소생하는 생명의 거듭남을 경험하였다. 부활하듯 새로 나타난 식물의 부산물에 기대어 그들은 생존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부활의 이야기 창조되었으며 모든 문화권은 자신만의 신화를 간직하고 있다. 엘리엇의 시는 다양한 식물 신화를 묘사하며 황폐화된 대지에 다시 재생을 모색한다.       

    

다양한 식물 신화      


“바람은 상쾌하게/ 고향으로 불어요/ 아일랜드의 님아/ 어디서 날 기다려 주나?”.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1막 중 ‘배꾼의 아리아’의 한 소절이라고 한다. 트리스탄은 이졸데를 그리워하며 죽어가고 있었다. 이졸데를 만나면 사랑의 묘약 힘으로 트리스탄은 살아날 수 있다.  시의 단락은 “/황량하고 쓸쓸합니다. 바다는./”으로 매듭을 짓는다. 이졸데의 배가 도착하는지를 살피던 목동이 죽어가는 트리스탄에게 전하는 노래 가사이다.   

    

엘리엇은 시에서 이졸데를 히아신스 아가씨라 부른다. “일 년 전 당신이 저에게 처음으로 히아신스를 줬지요./ 다들 저를 히아신스 아가씨라 불렀어요” 고대 식물 신화가 있었던 지역에서는 인구증가나 풍부한 수확을 기원하며 풍요제를 지냈다. 이때 히아신스 꽃은 풍요제에서 부활하는 신의 상징이었다. 이졸데를 히아신스 아가씨라 부른 것은 부활의 힘을 간직한 이졸데가 죽어가는 트리스탄을 소생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졸데가 도착하기 전에 트리스탄은 죽음을 맞이한다.  

    

“황무지”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식물 신화가 기독교 문명과 결합하면서 나타난 어부왕 신화가 나온다. 어부왕 신화는 기독교 문명권에서 나타나는 식물 신화 중 최고봉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기슭에 앉아/ 낚시질했다. 등 뒤엔 메마른 들판./ 적어도 내 땅만이라도 바로 잡아 볼까? 런던교가 무너진다 무너진다./ 그리고 그는 정화하는 불길 속에 몸을 감추었다.               


기슭에 앉아 낚시질하고 있는 인물은 어부왕이다. 어부왕은 예수에게 무덤을 제공한 아리마대의 요셉이 가져온 성배(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가 사용한 잔)를 가족 대대로 지키고 있었다. 성배는 어느 문화권에나 존재하는 생명을 풍성하게 만드는 신성한 물건과 그 의미가 결합된 생명의 잔이다. 그런데 어부왕은 불임의 병에 걸렸고 그의 대지는 점점 쇠약해져 황무지로 변해간다. 어부왕은 강기슭에 앉아 낚시질하며 자신의 병을 고쳐줄 기사단을 기다린다. 쿠마의 무녀가 ‘죽고 싶’다 기원한 그 곳에서 어부왕은  라일락을 키워내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울 기사를 기다리고 있다.       


엘리엇의 시 "황무지"는 인도의 철학서인 우파니샤드의 형식적인 결어로 끝을 맺는다. 이는 T.S 엘리엇이 황무지에서 쿠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당부의 메시지일 것이다.  --------- 다타(주라). 다야드밤(공감하라). 담야타(자제하라)./ 산티 산티 산티 (이해를 초월한 영원한 평화). 

 



◈ 엘리엇의 “황무지”를 읽으며 첫 구절만큼이나 나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시구가 있다. “항상 당신 옆에서 걷고 있는 제삼자는 누구요?/ 세어 보면 당신과 나 둘뿐인데/ 내가 이 하얀 길을 내다보면/ 당신 옆엔 언제나 또 한 사람이/ 갈색 망토를 휘감고 소리 없이 걷고 있어,”


갈색 망토를 휘감아 그 형상은 명확하지 않지만, 천의 얼굴로 나타나, 당신 곁에서 소리 없이 함께 걷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고 T.S 엘리엇은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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