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그 소리를 듣고 있었어"

by 유재석

소년이 온다 - “그 소리를 듣고 있었어”


1) 난 가까이 가려 그 언어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분노, 고통, 뜨거운 슬픔 때문에 마음을 추스르며 읽어 나갈 수밖에 없는 책 “소년이 온다”. 한가운데 있는 자는 말없이 타올랐고, 함께 하려는 자는 언어로 함께 하고 있다. 난 가까이 가려 그 언어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조금 차갑게 어쩌면 더욱 차갑게 다가간다.


수번을 반복하여 들어가 가르고 얽어서 꼿꼿이 꽂혀오는 언어를 살갗으로 받아 안는다. 차가움이 날카롭게 내려가면 달군 쇠와 같다 하니, 그 차가움으로 한강의 시적이고 실험적인 스타일이 어떠한 방식으로 세계인의 가슴을 달구었는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2) 동호는 역사적이며 신화적인 인물이다.


외할머니에게서 빠져나간 어린 새 같은 혼을 보았던 소년은 같이 나가자는 동료 누나를 뒤로하고, 뻗은 엄마의 손길을 잡지 않고 발길을 안으로 돌려 광주 오월의 가장 깊은 곳에 머무른다. 그리고 총격의 마지막 고통을 안고 도청 안마당에서 쓰러진다.


쓰러져 사라진 너는 기억하고픈 삶이 역사의 두께에 눌려있을 때 우리를 꽃핀 쪽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물음을 던지며 다가온다. 수건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로, 말없이 해골을 들고 있는 무대 위 소년으로, 이제 늙은 엄마가 눈길을 떼지 못하는 어느 머시매로.


책 속 작가의 붓끝은 동호의 혼을 따라간다. “목이 길고 옷이 얇은 소년이 무덤 사이 눈 덮인 길을 걷고 있다. 소년이 앞서 나아가는 대로 나는 따라 걷는다.” 그리고 기억하는 자는 묻는다. “누구야. 누가 오는 거야. 누가 이렇게 가벼운 걸음으로 걸어오는 거야.”


3) 몸을 놓치지 않으려는 정대의 혼


동호와 함께 있다 총에 맞은 정대의 혼이 몸을 떠나지 않고 자신을 보고 있다. “난 내 몸을 놓치지 않으려고 뺨에, 목덜미에 어른어른 매달려 트럭에 올라탔어.” 정대의 혼은 삶을 살았던 육체의 한 조각에 매달려있다. 몸에 낱낱이 기억되어 있는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혼은 살과 뼈에서 떠나지 않으며, 이 땅의 시간 속에서 소중하게 간직해 왔던 것들을 알려준다. 기필코 지키야 할 것들을 알려준다. “내가 아직 몸을 가지고 있었던 그 밤의 모든 것, 늦은 밤 창문으로 붙어 들어오던 습기 찬 바람, 그게 벗은 발등에 부드럽게 닿던 감촉, 잠든 누나로부터 희미하게 날아오는 로션과 파스냄새, ---- 누나가 두 번 쓰다듬어준 내 얼굴, 누나가 사랑한 내 눈 감은 얼굴.”


혼은 육체에서 완전히 떠나기 전에 조금 더 기억하려고 한다. ‘여름밤의 등목’,‘페달을 밟던 감각’,‘혀를 데어가며 먹던 햇감자’,‘설탕같이 부스러지는 수박’,‘창틈으로 들어오던 아카시아 냄새’,‘국화빵 봉지를 품던 외쪽 가슴’. 그리고 생각한다. 너무도 너무도 이해하지 못하여 궁금한 것,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4) 은숙은 무대 위 달싹이는 입술을 읽는다.


역사 속으로, 시민 속으로 들어가야 할 글들이 검열이라는 검디 검은 어둠으로 덮여 간다. “그렇게 오십 페이지를 넘어가자, 선을 긋는 것이 수고스러웠는지 잉크에 담근 롤러로 페이지 전체를 검게 지워놓았다.” 쓰여 읽혀야 할 글이 검게 그어져 출판되고, 무대 위 울려 퍼져야 할 목소리가 침묵하며 더듬더듬 입술만 달싹일 뿐이다.


검게 그어져 사라진 부분을 기억하는 은숙은 무대 위 달싹이는 입술을 읽는다. “그 입술의 모양을 그녀는 또렷하게 읽을 수 있다. ----두 팔이 힘껏 허공으로 뻗어 올라온다. 목마른 물고기처럼 그의 입술이 달싹인다. 음성이 높아야 할 부분에서 신음처럼 끼익, 끽소리가 난다. 그 입술 모양도 그녀는 읽는다.”

“어이, 돌아오소. 어어이, 내가 이름을 부르니 지금 돌아오소. 더 늦으면 안 되어. 지금 돌아오소. 최초의 당혹한 웅성거림이 객석을 쓸고 지나간 뒤, 이제 관객들은 무서운 침묵과 집중력으로 배우들의 입술을 응시하고 있다.” 문맥을 더듬어 의미를 확장하고 몸으로 관계하며 역사 속으로 끌어온다. 달싹일 뿐인 입술에서 나오는 웅얼거림은 나에게서 읊어지고 시대의 삶 안으로 흘러들어온다.


“소년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그 순간이다. 순식간에 소년은 무대로 뛰어올라가 노파의 굽은 등허리에 바싹 몸을 붙인다. 업힌 어린아이처럼, 혼령처럼 살금살금 뒤를 따른다. ---동호야. 그녀는 아랫입술 안쪽을 악문다. ---무대 아래 네발짐승처럼 모여있던 배우들이 별안간 꼿꼿이 허리를 편다. --- 업힌 아이처럼 바싹 붙어 걷던 소년이 객석을 향해 몸을 돌린다.” 읽던 나의 입술이 움직인다. 동호야


5) 선주는 물수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듣는다.


선주는 건조해 걸어놓은 물수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를 듣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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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더 고요히 울리는 발자국 소리.

느린 춤의 스텝을 연습하는 아이처럼 반복해서 제자리를 디는 두 발의 가벼운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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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는 거기서 들린 거였어.

거기서 물방울들이 끝없이 떨어져 장판 바닥을 흠뻑 적시고 있었어. ”



“하지만 그 겨울이 갈 때까지, 더 이상 물수건이 필요 없는 봄이 된 뒤에도 그 소리가 문 쪽에서 들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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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야.

누가 오는 거야.

누가 이렇게 가벼운 걸음으로 걸어오는 거야”


선주는 죽기 위해 간 그 도시에서 학생들이 가톨릭센터 외벽에 붙여놓고 간 사진을 본다. 동호였다. “도청 안마당에 모로 누워 있었어. 총격의 반동으로 팔다리가 엇갈려 길게 뻗어 있었어. 얼굴과 가슴은 하늘을, 두 다리는 벌어진 채 땅을 향”해 있고. “옆구리가 뒤틀린 그 자세가 마지막 순간의 고통을 증거하고 있”었어.

“입술을 악문 채, 눈앞에서 일렁이는 파르스름한 어둠을 향해 당신은 묻는다. 내가 집으로 가라고 했다면, 김밥을 나눠먹고 일어서면서 그렇게 당부했다면 너는 남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 그래서 나에게 오곤 하는 거야? 왜 아직 내가 살아 있는지 물으려고.”


그 여름 너는 죽어 썩어갔고, 혼마저 육체를 떠나버렸다. 그리고 난 이렇게 분노와 고통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젠 들려오는 물음과 함께 살아가려 한다. 이제 할 말은 하나뿐이다.

죽지 마.

죽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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