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래서 고학력 며느리를 반대한거야."
결혼한 지 8년, 신혼때 꽤 자주 듣던 레파토리를 오랜만에 들었다.
"나는 초등학교만 나와도 좋으니, 순종적인 며느리를 원했어. 그렇다고 네네 거리라는 건 아니야."
마치 도돌이표 같다. 헤어나오고 싶은데 영원히 갇혀서 계속 같은 곳만 맴도는 그 곳, 시어머니.
"너도 서운한 점이 많겠지만 나는 정말 많이 참고 살아. 꾹꾹 눌러서 쌓아놓는다고."
무엇을 쌓아놓으시는 걸까. 도대체 무엇을 참고 계신걸까. 가슴이 벌렁거린다. 심장 박동이 올라가고 금세 울음이 터질 것 같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 빌라, 8년 전 그 집에서 자주 시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전화를 하신 게 아니었다. 그저 당신이 내뱉고 싶은 말을 쏟아내고 싶었을 뿐. 나는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냥 듣고 전화를 끊은 뒤 울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할 수 없었고 친구에게 카톡을 할 수도 없었다. 기분 전환을 하러 나갈 수도 없었다. 나갔다 다시 올라오는 계단 3층 즈음, 나는 늘 울었다. 꼭 내 인생같아서. 계단을 올라올 때마다 엘리베이터 없는 집을 후회했다.
그때도 시어머니는 고학력의 며느리를 원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럴거면 초등학교만 나온 며느리가 더 좋다고. 문득 같은 부서 대리가 입사 일주일인 나를 불러내 한 소리가 생각났다. 자기보다 나이도 많고 고학력인 후배가 들어와서 회사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를 걱정하는지 아냐고. 그렇게 대리는 회의실에서 소리를 지르며 나와 나보다 나이가 많은 선배를 함께 깠다. 대리는 지금도 모를게다. 그 날, 자신의 자격지심도 함께 까 보였다는 걸.
"어머님, 어머님은 참지 않으세요. 전화로도 말씀하시고 불러서도 다 말씀하세요. 어머님 하고 싶은 말씀 다 하고 계세요."
결혼 9년차, 부동산 계약서만 5번을 썼다. 남편은 시어머니를 바꾸진 못했지만, 내가 얼마나 남편을 아끼는지 안다. 남편은 효자지만, 시어머니가 얼마나 나에게 못되게 구는지 안다. 남편의 그 확신이 디딤돌이 되어 흔들하는 가슴을 눌러준걸까. 차오르는 눈물이 멈추고 조금 흔들리는 목소리로 어머님에게 말했다. 펄쩍 뛸 줄 알았던 시어머니가, 조용했다. 그리고 그 말에 시어머니는 대응하지 않았다.
대신, 나에게 서운한 점을 다시 열거했다. 명절이나 어버이날, 생신 며칠 전 전화를 해서 이번에는 어떤 음식을 하고 무엇을 할지 물어보지 않는 점, 가족 여행을 가면 일찍 일어나 아침을 차리지 않는 점, 평소에 전화하지 않는 점, 시누이와 친하게 지내지 않는 점...
"너도 네 부모에게는 귀한 자식인데, 사랑받고 싶지 않니?"
시어머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나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모두 내 탓이었다. 적어도 시어머니는 그렇게 생각했다. 고학력자여서 가족 여행에서 일찍 일어나 아침을 차리지 않은 탓, 많이 배워서 명절 이틀 전 시댁을 가는데 그보다 전에 어떤 음식을 준비할지 여쭈어보지 않은 탓, 신혼 때 매주 시부모님을 모시고 식사를 했는데 시댁에 안부 전화를 하지 않은 탓, 생신때마다 백화점에서 케이크를 예약했지만 생신 며칠 전에 따로 전화를 드리지 않은 탓... 내가 사랑받지 못하는 건 모두 다, 내 탓이었다.
시어머니는 계속 말했다. 부당했다. 그저 늘 듣고만 있던 내가 꿈틀거렸다.
"어머님, 어머님은 제가 세상에서 아는 사람 중에 제일 무뚝뚝한 사람이세요. 저는 어머님이 무서워요. 언제나 무표정으로 딱딱하게 제 인사를 받고 말씀하세요. 저는 늘 상처받아요."
시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식을 포장해서 시댁에 가면, 시어머니는 늘 나 이런거 별로 안 좋아해라고 말했다. 없는 형편에 워커힐 뷔페를 모시고 간 날도 시어머니는 와보니 별로네 라고 말했다. 시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을 다녀도 시어머니는 한번도 고맙다고 하지 않았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가면 왜 여기는 쟁반이 없니? 행주는 왜 한 개밖에 없냐며 리조트를 돌아다니며 리조트를, 아니 나를 타박했다.
"야. 이마트가서 커피 우유 사와."
시어머니는 부모님이 물려준 이름으로도, 며느리라는 호칭으로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늘 "야."라고 불렀다. 시어머니가 "야."라고 부를 때마다 아직도 딸기를 씻어 꼭지를 떼주는 엄마가 생각났다. 결혼 9년차, 아직도 시어머니는 나를 야 라고 부르고 늘 명령조로 말한다. 하지만 그런 시어머니의 아들에게 나는 늘 예쁘게 말한다. 귀하게 살라는 엄마의 바람은 지키지 못했으니, 아름답고 품격있게 살라는 엄마와의 약속은 꼭 지키고 싶었다.
"어머님, 명절 전에 미리 전화드려 음식 준비와 안부를 여쭙는 건 저희 집에서는 하지 않았던 일이에요."
"이래서 내가 고학력 며느리를 반대했던 거야."
가끔 생각한다. 회의실에서 소리지르고 먼저 나가던 대리의 뒷모습은 의기양양했다. 이겼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대리는 이기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고 싶은 말을 다 내뱉은 시어머니는 식당에서 저녁식사 내내 기분이 좋아 보였다. 시어머니는 뼈다귀 해장국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고 나는 소머리곰탕을 남겼다. 시어머니는 이기고 싶었던 모양이다. 어버이날 무얼 준비했냐고 물었다. 카네이션 리스를 준비했어요. 시어머니는 승리의 깃발을 꽂은 듯 웃었다.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해."
전쟁은 무언가를 빼앗기 위해서나 내 것을 지키기 위해 일어난다. 집으로 돌아와서 남편은 부끄럽고 미안하다고 했다. 시어머니의 승리 깃발이 그에게는 수치스러웠던 모양이다. 시어머니는 전쟁으로 무언가를 지켰을지 모르지만, 그 전쟁의 끝엔 남편의 쪽팔림이 항상 남았다. 남편에게 말했다. 시어머니에게 상처는 받았지만, 그래도 나는 너를 제일 아끼고 사랑한다고. 남편은 나를 보지 않은 채 고맙다고 했다. 매번 전쟁에서 이기는 시어머니도 빼앗아가지 못하는 게 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눈에만 보인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사람만 지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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