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만에
드디어 미국에 온 지 두 달여 만에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에이젼시에서 소개한 시립병원 투석실이다.
에이젼시는 나를 보고 너무 lucky 라 했다.
투석실은 특수부서로 사실 미국에서도 opening 이
나기 쉽지 않다고 했다. 개월에서 8개월간 분만휴가를 간 정규직 간호사의 대체자리다.
보통은 은퇴한 나이 많은 간호사를 고용해 몇 달 빈자리를 채울 뿐이라 비싼 시간당 페이를 해야 하는 에이젼시 간호사를 고용하는 경우는 참으로 드물다 했다.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투석실 매니저 Janet과 처음 인터뷰를 잘 마쳤다. 상당히 키도 크고 덩치도 있어 하얀 랩가운이 제법 어울리는 블론드 커트머리 백인이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대답을 했는지 지금도 기억이 안 난다. 다만 에이젼시 매니저 Nancy 가 시킨 대로
slowly and clear 하게 또박또박 답을 했다는 것밖에.
인터뷰가 끝마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Nancy 가 다그치며 물었다 어땠냐고 , 나는 그저 I did good이라고 답하자 웃으며 You are so cute이라고 마음에 들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일을 해야 에이젼시는 병원으로부터 돈을 받고 그 돈의 30% 만 시간당 페이로 우리에게 돌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끼리로는 노예계약이라고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에이젼시 도움이 없지는 않기에 필요악이다 ,
1년간 일해주는 대신 영주권을 주고 job을 소개해 주니 , 나 같은 경우는 네 식구가 다 나한사람으로 인해
미국 영주권이라는 것을 바로 미국 온 지 한 달 만에 받게 됐으니 할 말이 없긴 하다.
매일 아침 쿵쾅쿵쾅 뛰는 내 심장 소리를 느끼며 출근을 시작했다. 시립병원 이 라선지, 건물 자체가 회색이어선지, 한국 병원과 비교했을 때 오래되고 우중충한 분위기의 별로 들어가고 싶지 않은 분위기의 건물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시립병원이라 홈리스도 많이 오고 가까운 곳에 교도소도 있어 죄수 환자들도 입원하는 그런 곳이었다.
투석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에서 대학병원 투석실에서 일하다가 영어공부 병행을 위해 요양병원 투석실로 옮겨 일해본 나로서는 미국에서 투석기계가 많이 예전 버전이라 속으로 많이 놀랬다. 투석원리나 치료과정은 비슷해서 어려움 없이 금방 익혔다.
다만 역시나 영어가 문제였다
일 시작한 지 한 일주일이나 되었을까,
나를 처음 인터뷰한 백인 매니저 Janet이 나를 따로 불러 그의 오피스에 앉혔다.
첫마디가
I heard You have communication problems.
. 이틀 전인가, 닥터 Balsam이라는 유대인 여의사가 투석실 유닛으로 전화가 왔을 때 거의 못 알아들은 일이 스쳐지나갔다. 아 Dr Balsam이 리포트했구나 …
직접 가까이서 대화하는 것도 미국 온 지 얼마 안 되어
너무 힘든데 더군 더 나 전화로 하는 얘기는 그저 씨부렁 거리는 소리로 들렸다. 무슨 말인지 몰라 옆에 앉아 있는 다른 간호사를 바꿔준 기억이 난다.
매니저 Janet의 요지는
네가 미국 온 지 얼마 안 되는 건 이해하지만 의사소통이 안돼서 일에 불편함이 있는 것은 용납될 수 없고, 더군다나 병원에서 환자 생명과 관련한 일이니 더 신중해야 한다. 그래서 한 가지 제안하는데,
일주일 시간을 줄 테니 일을 그만두던지, 협력 요양병원에 투석실로 가던지 결정하라는 것이었다. 그곳은
나이 많은 노인 요양병원 투석실이라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어도 skill만 있으면 일은 할 수 있을 거리고,
그곳으로 옮기는 것은 도와주겠단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오천달러를 달랑 들고 가족 4명이 이민을 온 지 두 달만 애 첫 직장에서 일한 지 일주일 만에 잘리게 생긴 것이다.
아니 우리 에덴이 개도 한 마리까지…
오천불 들고 왔다니 다른 사람들이 헛웃음을 웃었다,
매일 같이 일해도 한 달 렌트비며 생활비를 감당하기 힘드니.. 손이 벌벌 떨리면서 눈물이 났다 …
하나님 아버지, 두 달 만에 쫓겨나게 하시려고 미국 보내셨어요? 아이엘츠 시험 10번 만에 영어시험 붙게 하시고서는… 이 온 가족이 저만 바라보고 있는데 어쩌라고요 …
남편과 긴 밤 상의 후 일주일 동안 그저 내려놓고 기도하기로 했다. 이곳에 보내주신 분도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니…
지금은 마음 편하게 글을 써 내려가지만
그때 매일밤 꺼억꺼억 울며 기도했던 거 같다 …
일주일 된 그날, Janet이 언제 또 나를 불러 앉힐까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오후쯤 되었을까, 나를 따로 부르지 않고 다른 간호사들 있는 투석실애서 서서 그저 웃으며 말했다
다른 간호사들이 다 네가 필요하대.
너랑 같이 계속 일하고 싶다고, 전화받는 것은 도와줄 수 있다고. keep it up 하고 가버렸다.
옆에 필리핀 간호사 Andy와 홍콩간호사 Yauri, 미국간호사 Sonia 가 나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사실 그 청천벽력 같은 Janet의 제안을 들은 다음날부터 기도하며 내가 한 것은 한 시간씩 일찍 출근해서
투석실안의 기계를 다 세팅해 놓은 것이다.
에이젼시 간호사인 나는 투석실 키가 없어 매일 아침
security를 불러 문을 열어 달라고 해야 했다.
기계 린스부터 세팅까지 미리다 준비해 바로 환자를
받을 준비를 다 해 놓았다.
말은 안 되니 몸으로라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봐서인지 다른 동료들이 매니저를 설득한 것이다.
나는 또 눈물이 났다, 이 사람들 마음은 다 읽어 주는구나 고마운 생각에. 또 눈물이 났다.
나중에 Janet은 자기는 다른 나라에서 다른 언어로 간호사 일을 한다는 자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너는 엄청나게 용감하고 도전적인 사람이라고 자랑스럽다고 칭찬을 해줬다.
8개월이 다되어 분만 간호사가 돌아올 때가 되자 현재 일하고 있는 좋은 사립대학병원 정규직 투석실 간호사 opening에 추천서를 망설임 없이 써주기도 했다.
미국은 무엇보다 전 직장에서의 추천서가 참으로 중요하다. 뒷돈이 없이 그저 순수한 나의 신용으로 이 사람을 적극 추천합니다라는 것이다.
부끄럽지만. 여전히 다양한 나라 다양한 발음과 억 센트로 들리는 전화 속 상대방 영어는 여전히 어렵다.
다만 매해 거듭되는 병원 일과 속에 무슨 일로 전화룰 걸었을지 , 무슨 내용인지 대충 알기에 눈치로 지혜로 응대하고 몸으로 오늘도 감사히 열심히 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