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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엄마 Jun 30. 2020

이제 눈치 보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다정한 일기 by 혜진


은결님의 일기를 읽을수록 새롭게 알아가는 기쁨이 크네요.

기.계.공.학.과.요?! 세상에나 만상에나. 저에겐 우주 외계어와 같은 그곳의 공부를, 또 수학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은결님은 나와 같은 결의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헉, 뼛속까지 문과 성향의 나와는 틀릴 수도'라는 충격?! 까지 받았더랬습니다.


은결님이 가르쳤던 후배가 승진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제 마음도 쓸쓸해지는 느낌 -

정말 승진운이 있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누가 잘됐더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흥, 운이 좋네'라는 생각부터 드는, 저도 그렇고 그런 인간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냥 '아, 인생 길다, 그래 먼저 가시오~' 이런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네요. 저 사람은 벌써 저만치 달리고 있는데, 난 이제 출발선 앞에 선 느낌이 들 때도요.


아, 인생 길다~ 그래 먼저 가시오~
나도 곧 내 갈 길 가리다.



은결님의 대학 생활 이야기를 듣다가 (공대 여대생이라니, 제 로망) 여기가 여대인가 싶을 정도로 압도적 성비를 자랑했던 일문과, 제 대학 생활도 잠깐 떠올렸더랬습니다.


대학교 3학년 때 교환학생으로 일본에 어학연수를 다녀왔던 기억도요. 제 첫 해외 경험이기도 했고, 처음으로 집을 떠나 혼자 살게 된 지라, 엄청난 인생의 도전처럼 느껴졌던 시기였어요. 마침 욘사마 덕에 한류에 대한 관심도 높았던 시기라, 저는 일본어 개인교습을 해줄, 그리고 한국어를 배우고 싶은 일본인 친구를 찾았어요. 그때 썸을 타던?! 일본인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요. 그 친구랑 꼭 같이 하고는 싶은데, 자존심도 상하고 좀 부끄럽기도 해서 '우리 같이 공부하자'라고 말을 못 하겠는 거예요. 결국 다른 (여자) 친구를 튜터로 정했는데, 그 남자 친구가 나중에 저한테 얘기하더라고요.

"왜 나한테 같이 하자고 안 했어?"

  


"왜... 안 했어?"라는 질문은 제20대와 30대를 관통하는 어떤 상징적인 질문처럼 남았어요. (정말 그러고 싶지 않은데) 저는 상대방의 기분이 잘 읽히고 태생적으로 분위기 파악을 잘해요. 주제 파악도 필요 이상으로 잘했죠.  그 덕에 적당히 눈치 보며 사는 법을 일찍부터 배웠던 것 같아요. '이렇게 하면 저 사람이 싫어할 거야' '괜히 그랬다가 분위기 이상해지면 어떡해' '아 그냥 하지 말자, 나만 참으면 되니까'


어떤 일이 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가도 새로운 시도로 인해 불편한 관계가 생길 것 같으면 포기하고, 어떤 말을 하고 싶다가도 그 말로 관계가 불편해질 것 같으면 포기하고.

미리 안될 것을 예견하고 포기하는 삶. 불편함을 감수하고 싶지 않아 포기하는 관계.

새로운 시도 앞에 항상 주저했던, 연애 관계에서도 항상 끌려다녔던, 회사에서도 제대로 의견 피력도 할 수 없었던 20-30대의 시간을 통틀어 어떤 후회와 미련 같은 것이 짙게 서려 있어요.



"내가 나일 때 좋은거다" 펭하!!



'미움받을 용기'를 읽다가 처음으로 제가 인정 욕구가 과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고, 불편함을 감수하기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책 제목대로 '미움받을' 용기라는 말은 저에게 충격이었어요. 나와 결이 맞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전부 인정받을 필요는 없구나. 너무 눈치 볼 필요 없구나.


그러면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하고 싶은 말, 그냥 하면서 살자라는 다짐을 -  마흔이 다 되어서야 하게 된 거예요.





조용히 회사나 다니고 책 읽고 끄적거리다가, 은결님도 아시는 것처럼 요즘 새로운 시도들을 해보고 있잖아요.

몇 년간 '회사 밖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좋아하는 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부가가치'에 대해 고민을 해왔었고, 올해 들어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한 발자국씩 디디고 있어요.


이제 막 첫 발을 뗐을 뿐인데, 발목부터 허벅지까지 - 온통과 냉탕을 오고 가는 이 격심한 온도차에 새삼 놀라고 있답니다. 요즘 제 모습이 팝콘 같다며 용기를 주는 이들부터 말할 수 없이 냉담해진 이들까지. 제일 당혹스러운 건 '선 경험자'의 얼굴을 하고 '그거 아니야'라며 훈수를 두고 싶어 하는 이들. 나와 일상을 공유하지도 않고 켜켜이 쌓아 올린 시간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으로부터 어떤 단면만 두고 훈수질 당하는 거 참 기분 별로예요.


예전의 저 같으면 잔뜩 움츠려 들어서 '아 그냥 하지 말자'했겠죠. 하지만 이젠 그러지 않으려고요.

이 일로 관계가 예전 같지 않은 이들은, 이제 그만 놔 드리고. '라테는 말이야' 훈수질 하는 관계는 조용히 마음에서 삭제. 같은 마음으로 가실 분들만 '이 열차에 타세요, 저는 그냥 제 갈길 가렵니다.'


"왜.... 안 했어?"라는 미련을 40대에는 남기지 않도록, 이젠 남의 눈.치.안.보.고. 살렵니다.


그리고 다짐한 일이 하나 있어요. 제가 한 달 전에 처음 유로 모임 공지를 했을 때, 너무 걱정이 돼서 잠을 못 잤는데요.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같이 할 거니깐, 그냥 공지 올려"


"내가 같이 할게"라는 말이 첫 발을 뗀 사람에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안 이상, 저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부터 경험치가 쌓이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처음부터 능숙한 사람이 어디 있나요. 그 어떤 전문가라도 첫 발 떼기가 가장 두렵고, 함께 해주는 사람이 있어 성장했다는 걸 잊지 말자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그 누군가 새로운 시도 앞에 몸을 떨 때, 먼저 가서 가만히 등을 어루만져 주는 사람이 되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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