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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엄마 Aug 04. 2020

바나나, 사과, 복숭아, 감

다정한 일기 by 혜진


지난주 목요일에 은결님이  "뭐 쓸지 주제 정해주세요"라고 카톡 주셨을 때, 전 아이 먹이려고 복숭아 껍질을 벗기고 있었어요.  즉흥적으로 "과일에 대해 써볼까요"라고 답해 놓고는, '아, 그런데 나는 과일을 안 좋아하지'라고 혼자 속으로 웃고 말았네요.


골수 고기 당원인 저는 기본적으로 야채, 과일을 많이 안 먹어요. 특히나 과일은 잘 안 챙겨 먹습니다. 이상하죠. 가족들 모두 과일을 좋아해서 냉장고에 끊이지 않도록 보충해 두는데, 정작 사두는 저는 손도 안 대니까요.

 




아빠는 바나나


지금이야 흔하디 흔하지만, 저희 초등학교 저학년 때만 해도 바나나가 귀한 과일이었잖아요. 비싸서 자주 사 먹지도 못했죠.

저희 아빠가 고속버스 기사로 일하실 때 장거리 운전을 하시느라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씩 집에 오셨어요. 아빠가 집에 오시는 날엔 손에 주렁주렁 뭔가 잔뜩 들려 있었는데 저희는 아빠가 반갑기도, 아빠 손에 들린 봉지가 반갑기도 해서 현관에서 방방 뛰면서 아빠를 맞았던 기억이 나요.  

그때 아빠가 (비싸서 많이는 못 사고) 꼭 네 개가 붙어 있는 바나나 한 묶음을 사 오시곤 했거든요.

한 사람당 딱 하나씩만 배급되던 바나나를 손에 쥐고 한 입씩 아껴 먹던 추억. 며칠간 밀린 수다를 아빠에게 한 바구니씩 털어두던 추억. 그 뒤로 우루과이 라운드와 FTA가 맺어지고 값싼 수입산 바나나가 우르르 수입된 걸로 기억해요. 네 개 한 묶음, 딱 한 개씩만 맛볼 수 있었던 바나나는 그 뒤론 꿀맛이 아니었던 것도 같고요.



엄마는 사과


엄마는 정말 과일광이거든요. 지금도 친정에 가면 김치 냉장고에 과일들로 꽉 차 있어요. 엄마 아빠 두 분이 드실 거면서 왜 그렇게 과일을 많이 사두냐고 묻기도 하는데, 두분에겐 '아침 과일은 황금'인  불문율과 같은 것.  친정집에 갈 때마다 (난 먹고 싶지 않은데) 눈만 뜨면 사과부터 깎고, 밥 먹고 또 깎고, 자기 전에 입이 심심하면 또 깎아요.  친정 가는 날은 과일 보충하는 날인 걸로 -



하은이는 복숭아


딸아이는 아기 때부터 워낙 입이 짧았어요. 우유도 양껏 먹는 법이 없었고요. 한 시간씩 불 앞에 서서 이유식을 만들어 바쳐도 한 숟갈 먹고는 인상 쓰며 손을 밀어내니- 정말 해 먹이는 보람이 하나도 없었죠. (제가 요리를 안 좋아하게 된 또 하나의 계기로 정당화해봅니다)

이렇게 입 짧은 아기도 넙죽넙죽 잘 받아먹는 음식이 있었으니 '과즙'. 이유식은 안 먹어도 과즙은 제 손을 잡아당기며 잘 먹더라고요. 뭐라도 먹여야 하니 비싼 유기농 제철 과일은 수시로 사다 나르며 갈아 먹였어요.

아이는 여전히 입도 짧고, 먹는데 영 흥미가 없습니다만, 과일은 지금도 좋아해요. 덕분에 전 안 먹어도 수시로 과일을 채워 넣고요. 여름이 되면  복숭아를 그렇게 맛있게 먹어서 지금 저희 집 냉장고엔 말랑한 복숭아로 꽉 차 있네요.



남편은 감


남편은 가을을 좋아하는데, 워낙 더위에 취약한 사람이라 기온이 서늘해져서도 그렇고 감이 나오기도 해서 그래요. 감은 꼭 홍시로만. (할머니 같죠?ㅋㅋ) 아침에 밥 먹기 싫을 땐 홍시만 세 개를 흡입하고 출근할 정도로 감을 좋아해요. 저는 굳이 고르라면 좀 딱딱한 질감의 단감이 좋지, 홍시는 너무 몰캉해서 싫거든요. 남편에게 왜 그렇게 감을 좋아하냐고 물으니, 몰캉해서 좋대요. 제가 싫어하는 그 이유가 딱 그 사람이 좋아하는 이유. 뭐 어디 홍시만 그렇던가요. 여러 면에서 나와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사람을 인정 혹은 모른 척 하고 살기로 하는데 십 년이 걸렸네요.



누군가 "좋아하는 과일이 뭐예요?"라고 물으면 그나마 즐겨먹는 과일이 뭐가 있던가 잠깐 고민하다 결국엔 '없네요'라고 말해요. 

저에게 과일은 먹고 싶은 대상이 아니라 가족들이 떠오르는 이미지이에요. 

바나나는 아빠, 사과는 엄마, 복숭아는 딸, 감은 남편.

과일 하나에도 떠오르는 사람, 이미지가 있는 걸 보니 저는 의미 붙이는 걸 참 좋아하는 사람인 걸로-


여름철 더위를 나기엔 시원한 수박이 제격인데 세 식구 중 수박을 좋아하는 사람이 저희 딸 한 명이라, 선뜻 한 통을 통째로 사기가 어렵네요. 반의 반통만 누가 좀 팔면 좋겠는데. 과일을 안 좋아하는 구성원도 포함된 핵가족을 위해 과일도 마이크로 단위로 팔아주시면 안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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