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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음 Apr 24. 2021

마음을 치료하는 법은,상실의 고통을 다루는 것이다.

(feat. 로리 고틀립 <마음을 치료하는 법>)

이 책은 책은 작가이자 심리상담사인 로리 고틀립이 쓴 책이다. 책의 구성은 작가의 내담자 4명과 상담을 하는 이야기와, 작가가 웬델이라는 상담자에게 상담을 받는 이야기가 교차로 진행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1명의 이야기가 끝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형식이 아니라,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지루할 틈 없이 전개된다. 산만한 구성처럼 보이지만 챕터마다 특정 주제가 연관되어 드러나기 때문에 전체 내용은 결국 하나의 이야기로 통한다.


어떻게 리뷰할까 고민스러웠다. 5명의 내담자 이야기를 정리하는 형식으로 리뷰를 하려다가, 문득 그들의 이야기가 모두 '상실'에 대한 이야기임을 깨닫게 되었다.


"심리치료사로서 나는 고통, 특히 상실에 뒤따르는 고통에 대해서 잘 안다. 그리고 그중에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게 있는데, 변화가 상실의 동반자라는 사실이다상실 없이는 변화할 수 없는데, 사람들이 변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현상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은 건 이 때문이다."

<마음을 치료하는 법> p.21




남자친구의 상실: 로리 이야기


이 책의 작가이자 심리치료사인 로리는 40대 중반을 지나는 어느 날 2년간 동거해 온 남자친구로부터 이별을 통보받는다. 이별의 이유는, 싱글 맘인 로리의 아들과 함께 살고 싶지 않다는 것. 로리는 정자은행으로부터 조지 클루니를 닮았다는 누군가의 정자를 기증받아 30대 후반에 싱글맘이 되었다. 생물학적 임신이 어려워지는 나이가 되었지만 짝을 만나지 못했고, 아이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 부분에 대한 에피소드도 무척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그녀는 타고난 이야기꾼 같다). 그 후 천생연분과 같은 변호사 남자친구를 만나 9살 아이와 함께 동거 중이지만 남자친구는 어느 날 갑자기! 아이와 함께 살기 싫다는 이유로 이별을 통보한다.


심리치료사인 로리는 남자친구를 상실한 고통 속에서도 내담자들을 만난다. 그러다 자신의 고통을 다루기 위해 '웬델'이라는 남자 심리상담사를 찾아간다. 첫 상담 시간, 그녀는 웬델 앞에서 눈물 콧물을 쏟으며 오열한다.


심리상담사가 자신의 심리상담사 앞에서 '내담자'로서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는 이 장면에서 왠지 모를 미소가 지어진다. '그래도 되는구나'를 확인한 것 같아서. 나도 누군가를 상담해 주고 있지만, 내 삶의 고통을 어쩌지 못해 나의 상담사를 찾아갔을 때 그랬으니까. '내담자들이 이런 나의 취약한 모습을 알면 실망할 텐데...'생각하다가도 어쩔 수 없었다. 나도 누군가에는 내담자일 수 밖에. 로리는 책 전체에서 시종일관 이런 시선을 유지한다. 심리상담사 역시 내담자의 한 명일 뿐이라는 것. 그래서 로리의 상담실에서는 마르틴 부버가 말하는 '나와 너'의 만남이 가능했던 것 같다.


아무튼 로리는 자신의 상담자 웬델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점점 깨닫는다. 처음에는 이 모든 고통이 남자친구를 상실한 고통으로 인한 것이라 생각했다.



"얘기를 되풀이하고 있는 건 알아요. 하지만 이해하셔야 할 것이, 저는 우리가 남은 인생을 같이 살 줄 알았거든요. 그렇게 되었어야 하는데, 이제 모든 게 무산됐어요. 인생의 절반이 지났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것도 몰라요. 남자친구가 마지막 사랑이었으면 어쩌죠? 그 사람으로 줄이 끝난 거면 어쩌냐고요?"

"줄의 끝이오?" 웬델의 목소리에 기운이 실린다.

"네, 줄의 끝이요." 내가 말한다.

그는 내가 말을 더하길 기다리지만, 그 대신 눈물이 또 흐른다. 처음처럼 거친 오열은 아니고 더 차분한 눈물이다. 더 조용한 눈물.

"깜짝 놀란 기분이라는 거 알아요." 웬델이 말한다.

"하지만 내게는 당신의 또 다른 말도 흥미로운데요. 인생의 절반이 지났다니. 이번 일로 망연자실하겠지만, 어쩌면 당신이 애통해하는 것은 단순히 이별만은 아닌 것 같아요."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얘기를 시작했을 때 그의 목소리는 한결 부드럽다. "남자친구를 잃은 것보다 뭔가 더 큰 것을 애통해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마음을 치료하는 법> p.73



이 질문을 듣고 로리는 웬델을 패주고 싶었다고 고백한다(이 장면에서 웃음이 난다. 나도 상담사를 패주고 싶었던 적이 있어서). 하지만 로리는 이 질문으로 변화의 걸음을 시작한다.


웬델의 맞장구를 절실히 원하는 만큼,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웬델의 헛소리야말로 내가 돈을 들여 여기에 온 이유라는 걸 알고 있다. 그저 남자친구에 대해 불평이나 하고 싶다면 가족이나 친구들 앞에서 공짜로 할 수 있으니까. 나중에는 그것 때문에 기분이 나빠질지언정, 사람들은 순간의 기분을 위해 불완전한 이야기를 지어낼 때가 많다. 그래서 가끔은 그 행간을 읽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마음을 치료하는 법> p.75


상담을 하다 보면 "질문"이 정말 중요하다. 결국 내담자 스스로 새로운 통찰에 이르러야 하는데 상담자는 좋은 질문을 통해 그 통찰을 촉진한다. 웬델과 로리 모두 행간을 읽어내는 좋은 상담자였다. 내담자에게 좋은 질문을 던지고, 그들이 스스로 답을 찾아갈 수 있도록 기꺼이 기다린다. 답을 찾은 듯해도 다시 퇴보하기도 하고, 상담자에게 무례하고, 일부러 상처를 주려 하는 내담자들에게도 그들은 바로 대응하지 않는다. 내담자의 삶을 깊이 이해하고, 그 맥락 속에서 내담자의 말을 이해한다(행간을 읽어낸다). 내담자의 공격을 쉽사리 오해하지 않고 그의 고통스러운 감정을 홀딩하고, 치료적 의도를 가진 말로 되돌려준다. 이 둘의 대화에서 심리상담의 과정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과정이 참 멋지게 느껴진다(물론 슬프게도 모든 상담이 이런 과정을 거치는 건 아니다).


로리와 웬델은 이런 과정을 거쳐 중요한 변화의 지점에 도달한다. 로리는 현재 남자친구를 상실한 고통에 빠져 있지만, 웬델은 로리가 현재의 관계보다 더 많은 것을 상실했기 때문에 더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준다.



"나는 미래의 관계를 상실했다. 우리는 미래가 나중에 펼쳐진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속에서 미래를 매일 만들어내고 있다. 현재가 와해되면 그것과 연결 지어왔던 미래도 무너진다. 그리고 미래를 빼앗기면 모든 플롯이 어긋난다. 하지만 과거를 바로잡거나 미래를 통제하는 데 현재를 써버리면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영원한 후회에 빠진다. 남자친구를 구글링할 때 나는 과거에 얼어붙은 채 그의 미래가 펼쳐지는 것을 지켜봤다. 현재를 살려면 미래를 상실했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마음을 치료하는 법> p.100~101



현재가 와해되면 미래가 함께 무너진다. 그러니 현재의 관계 뿐만 아니라 미래의 관계도 상실된 고통에 빠진다는 말이 마음에 깊이 와닿는다. 늘 그래서 고통이 더욱 크게 느껴졌나보다. 현재에만 사는 것으로 부족해서 늘 현재와 연결된 미래를 꿈꿔 왔으니까. 현재가 무너지면 나의 미래도 무너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상실의 고통은 배가 되었던 것 같다. 현재를 살라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현재를 사는 사람은 현재의 고통에서 미래의 고통까지 껴안지 않을 테니까.


로리는 그 이후로도 같은 웅덩이에 빠져 불행을 반복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간다. 한 걸음씩. 상담을 진행하며 로리는 웬델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또 하나의 일부에서 이미 무너지는 경험들을 하고 있었지만, 웬델에게는 두려움과 수치심으로 인해 말하지 못했다. 이 사실을 고백한 후 상담은 더 큰 변화를 맞이한다. 변화의 고비마다 웬델의 중요한 질문이 있다.



"당신이 치르고 있는 싸움에 대해 얘기할 준비가 됐나요?" 웬델이 묻는다.

"남자친구와의 싸움을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나 자신과?"

"아니요. 죽음과의 싸움이요."

웬델이 이 질문을 미리 준비해 놓고 때를 기다린 것 같다. 심리치료사들은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구축하는 것과 환자가 계속 고통받지 않도록 실질적인 치료에 돌입하는 것 사이에서 늘 균형을 추구한다. 처음부터 우리는 느긋하면서도 재빨리 움직이는데, 이야기의 속도는 늦추면서 관계 설정에는 속도를 높이고 그러는 와중에 전략적으로 씨앗을 뿌린다. 자연에서와 똑같이, 씨앗을 너무 일찍 뿌리면 발아가 되지 않는다. 너무 늦게 뿌리면 싹이 나오긴 해도 가장 풍성한 때를 놓친가. 딱 적당한 때에 뿌린 식물은 자양분을 듬뿍 흡수하며 잘 자란다. 우리의 일은 지지와 대치를 오가는 섬세한 춤이다.

<마음을 치료하는 법> p.215~216



이 부분을 읽으며 놀라웠다. 웬델은 로리가 죽음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책 속에 담긴 내용 외의 장면에서 알았을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로리는 남자친구와의 이별로만, 계약한 책을 쓰지 못한 이유로만 고통스러웠던 게 아니다. 그 당시 그녀가 상담을 하고 있던 시한부 암 환자를 통해 그녀 역시 죽음에 대해 직면하고 있었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실존적 불안 속에서 남자친구와의 이별로 고통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웬델은 이 점을 간파했다.



"웬델은 내가 그에게 털어놓은 관심사를 나열한다. 이별, 책, 나의 건강, 아버지의 건강, 아들의 성장. 내가 하는 얘기에는 전부 불확실성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언제까지 살게 될까? 죽기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중에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은 얼마나 될까? 그런데 웬델에 따르면, 나도 내 환자처럼 나만의 대처 방식을 만들어냈다. 내가 내 손으로 인생을 망친다면, 그것이 일어나길 기다리지 않고 내가 직접 죽음을 설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꼭 그걸 원한다는 게 아니라, 최소한 그걸 선택하겠다는 것. 나무에 복수하기 위해 내가 앉아 있는 가지를 잘라버리는 것처럼. '맛 좀 봐라. 불확실성아!'


통제력의 한 형태로서의 자기 파괴, 나는 이런 역설로서 내 마음을 감싸려 했다. 죽음이 일어나기 전에 죽음을 설계하는 것처럼. 끝이 빤한 관계를 지속한다면, 작가로서의 이력을 엉망으로 만든다면, 몸의 이상을 직시하는 대신 두려움 속에 숨어 버린다면, 나는 살아 있는 죽음을 만들어낼 수 있다. 내가 지배하는 죽음을.

<마음을 치료하는 법> p.365



심리적 증상은 대부분 근원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근원적 문제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맞닿아 있다. 실존적 한계에 부딪히는 고통,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삶에 대한 항복. 증상은 우리 나름의 통제력을 가지려는 자기 파괴의 방식이다. 작가의 말대로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살아 있는 죽음이며, 내가 지배하는 죽음이다. 아마도 부분적 의미에서 자살을 행하고 있는 것일 수도...


그럼에도 로리와 웬델은 실존적 불안과 고통을 함께 직면하면서 삶의 불확실성이 희망의 상실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기 시작한다. 오히려 가능성이 있다는 뜻으로 차츰 받아들인다. 로리는 웬델과의 상담만으로 이런 변화를 맞이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상담하는 내담자들의 만남에서 자신의 이슈와 맞닿는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다시 깨닫고, 내담자들의 변화를 통해 자신 역시 살아갈 동기를 부여받는다. 삶의 불확실성이라는 확실성을 받아들인다.


로리와 웬델은 상담 종결 즈음에 이르러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이상 야릇한 춤이 아니다. 삶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인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자유를 누리는 춤이다. 그들의 춤이 생경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렇게까지 '나-너'로 만날 수 있는 그들의 관계가 참 부러웠다.




내가 만났던 내담자들을 떠올려 본다. 그들에게 나는 어떤 의미일까? 며칠 전 종결한 내담자가 편지를 전해줬다. 정성스럽게 손글씨로 적은 편지에, 자신이 좋아하는 책의 한 구절을 오려서 붙였다. 

   

그 친구의 고통을 해결해 주지 못하는 내 무력감이 참 싫었는데... 그 친구는 고통을 해결해 주겠다고 나서지 않아줘서 고맙단다. 함께 있어준 것만으로도 좋았다고. 그것만으로 정말 괜찮은 건지 아직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 함께 무력해진 상태로 곁을 지키는 것도 의미 있는 일임을 깨닫게 된다. 나에게는 너무나 과분한 인용글이지만 앞으로 만날 내담자들에게 그렇게 곁을 지켜달라는 당부처럼 받아들이고 싶다.


언젠가... 나도 내담자와 함께 춤을 출 수 있을까?


같은 인간으로서 겪는 상실의 고통을 함께 견디며, 삶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인 자들이 추는 자유로운 영혼의 춤을 출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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