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평균의 종말>)
나는 아들의 중학교 28년 선배다. 나는 3회 졸업생, 아들은 31회 졸업생이 될 예정이다. 30년이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우리나라의 교육은 얼마나 달라졌는지 잘 모르겠다. 교육 커리큘럼이나 평가 방식이 달라지긴 했지만, 사회적 평가는 여전히 "평균"을 기준으로 이루어진다.
평가 방식에서 정량적 평가와 정성적 평가를 종합하겠다는 의지는 엿보이나 학교 조직, 선생님들, 나를 비롯한 학부모들은 30년 전이나 변함없이 자녀가 평균보다는 우월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며 문득 나의 고군분투가 어리석게 느껴졌다. 심리상담을 공부하면서 차츰 깨어지고 있던 나의 평균주의적 허상에 도끼질을 해주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도 무의식 안에 자리 잡고 있던 "평균"의 개념에 대해 다시 고민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길 바라본다.
"개개인을 측정하기 위한 척도로서의 평균이라는 개념은 우리 뇌리에 너무 뿌리 깊이 박혀 있어
여간해선 진지한 의문을 품기도 힘들다. 우리는 이따금씩 평균이라는 것에 거북함을 느끼면서도
평균이 사람들에 대해 어느 정도의 객관적 사실을 보여주는 지표로 받아들인다."
<평균의 종말> p.30
저자 토드 로즈는 단언한다. 평균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우리 사회의 거의 대부분의 평가 기준이 되는 "평균"이라는 개념은 허상일 뿐이라고 말이다. 저자는 ADHD로 진단받고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그 후 결혼을 일찍 하는 바람에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그는 10가지나 되는 최저임금 일자리(용접공, 서빙 등등)를 전전하며 생활보호 대상자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고등학교 중퇴 후 15년 뒤에 하버드대학교 교육대학원의 교수가 되었고, 이 대학원의 지성, 두뇌, 교육 프로그램 책임자를 맡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걸까? 그는 말한다.
"사실 내가 인생 반전을 맞을 수 있었던 것은 처음엔 직관에 따라, 또 그 뒤엔 의식적 결심에 따라개개인성의 원칙을 따랐기 때문이다."
<평균의 종말> p.37
저자의 인생을 반전시킨 개개인성의 원칙은 무엇일까. 하지만 그전에 우리의 개개인성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평균"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우리의 삶에 어느 정도로 밀접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1819년 아돌프 케틀레라는 과학자는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업적에 과학계가 경탄을 표하고 있을 즈음, 당시 과학계의 대세였던 천문학 분야에서 그에 필적할 만한 업적을 세우고 싶어 했다. 그러다 천문학적 관찰에 따른 평균의 개념을 인간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병사 5,738명의 가슴둘레를 인치로 측정해 자료로 제시했는데 각 측정값을 합산한 다음 그 합산 값을 총 병사 수로 나눴다. 그 결과 약 39.5인치를 평균 가슴둘레로 계산하게 되었는데 이 수치는 과학자가 인체의 특징을 평균값으로 계산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여기까지는 크게 잘못된 게 없다. 하지만 그의 "평균에 대한 해석"은 대단한 논리적 비약이 있었다. 그리고 그 논리적 비약은 사회에 큰 파급력을 일으키며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그의 평균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천문학에서 개별적 천체 측정값은 모두 예외 없이 오류가 존재하기 마련이다(여러 과학자들이 잰 토성 속도 측정값이나 한 과학자가 여러 번 측정한 토성 속도 등). 케틀레는 개별 측정값 전체에 걸쳐 축적된 전체 오류 값은 평균 측정값을 통해 최소화될 수 있다고 믿었다(믿음이지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케틀레는 그 믿음을 인간의 평균 개념에 적용하여 개개인이 오류에 해당하고 평균적 인간이 참 인간에 해당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P.53).
후대에 '통계학의 아버지'라 불리게 된 케틀레는 그 이후에도 닥치는 대로 평균을 내기 시작했다. 평균 키, 평균 체중, 평균 결혼, 평균 사망 연령 등등. 케틀레의 주장에 따르면 이런 평균값 모두는 유일한 참 인간, 즉 평균적 인간의 숨겨진 특성을 상징하는 것이었다(P.54). 그리고 충격적인 부분은 평균적 인간을 우상화하고, 평균에서 벗어난 개인들에 대해서는 혐오감을 공공연하게 표현했다는 점이다. 개개인은 오류에 불과했다(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우리 엄마의 레퍼토리 중 일부였다. "남들하는 건 다하고 살아봐야 된다~ 남하고 너무 다르면 안된대이~~").
"평균적 인간의 비율 및 몸 상태와 다른 모든 측면은 무조건 기형과 질병에 해당될 소지가 있다.
간주된 비율이나 형태와 비슷하지 않을 뿐 아니라 관측된 한계를 초과하는 모든 것은 기형에 해당될 소지가 있다."
<평균의 종말>p.55
우리는 이런 케틀레의 논리적 비약을 비웃으며 넘길 수 있다. 하지만 당대의 학자들과 사상가들은 그를 비웃기는 커녕 천재로 치켜세웠다. 칼 마르크스는 케틀레의 개념을 받아들여 공산주의 경제 이론을 세우며 평균적 인간이 역사 결정론을 성립시켜주는 증거라 밝혔다(p.57). 실험 심리학의 아버지 빌헬름 분트는 '그 어떤 철학자보다 통계적 평균이 심리학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고도 말했다.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의 각 분야에서 평균적 인간의 개념은 그 파급력이 대단했다.
오늘날에도 그의 논리는 여전히 유효하다. 유형론이 대표적인데, 인간의 마음은 '노숙자들', '초딩들', '중딩들', '여자들', '장애인들', '정치인들' 같은 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일정한 평균적 특징에 따라 행동한다고 가정하며 단순화해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케틀러가 평균적 인간 개념을 도입한 이래로 과학자들은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유형들의 특징을 'A형 성격', '사사건건 참견형', '우유부단형', '돈키호테형' 등의 평균적 속성으로 규정지으며 어떤 개인이든 유형화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평균의 시대를 개막한 또 다른 주인공은 찰스 다윈의 사촌, 우생학의 아버지가 된 프란시스 골턴이다. 그는 인간을 유형화하는 것도 모자라 "계층화"하기 시작했다. 케틀레는 평균을 이상화했으나 골턴은 평균을 뛰어넘는 자들을 "우월층"으로, 평균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은 "저능층"으로 구분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지력이 우월층에 든다면 그 사람의 성품, 신체 건강, 미모, 자기 관리에서도 우수할 것이라 간주했다. 통계자료를 들이대며 최고의 자질들은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간주했다. 골턴은 현재 사회과학 연구방법론에서도 자주 사용하는 상관관계 분석방법을 착안해내기도 했다. 저자는 이 둘의 논리적 비약이 아직까지도 우리의 삶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우리는 누구나 가능한 한 평균을 훌쩍 뛰어넘으려는 압박감을 느낀다. 우리가 평균 이상이 되려고 그렇게 기를 쓰는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좀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평균 이상이 되려고 기를 쓰는 이유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즉 평균의 시대에서 성공하려면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거나, 아니면 평균 이하로 평가받아서는 안 된다는 강박에 내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평균의 종말> p.64
케틀러와 골턴의 개념이 사회에 깊게 뿌리박도록 기여하게 된 후대의 인물들은 계속 등장한다. 프레더릭 윈슬로 테일러와 에드워드 손다이크. 테일러는 부유한 집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공장에서 직접 일을 해보면서 표준화된 시스템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기업은 직원이 아무리 특출한 인재라고 하더라도 시스템을 개개인에게 맞춰서는 안되며, 시스템에 잘 맞는 평균적 인간을 고용해야 한다고 단언했다. 이때부터 직원들을 표준화된 시스템에 맞게 돌아가도록 관리 감독하는 "관리자"라는 직책이 생겨났으며, 시스템이 더욱 효율적으로 돌아가도록 컨설팅하는 경영 컨설팅업이 생겼다.
테일러주의는 미국의 자본주의와 동일시되었지만 국경을 넘어 각광받았다. 소련에서도, 일본에서도 기업들은 표준화와 사원-관리자 분리 원칙에 철저하게 따랐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지구상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잘나가는 기업의 상당수는 여전히 직원들의 개개인성을 등한시하는 시스템으로 조직되어 있다(p.81).
"과거에는 인간이 최우선이었다면 미래에는 시스템이 최우선이 돼야 한다."
-프란시스 윈슬로 테일러, <평균의 종말> p.72
20세기의 테일러주의는 교육에도 파고들었다. 교육적 테일러주의자들은 많은 학생들이 테일러화된 표준화 시스템에서 적응할 만한 인재(?)들을 다량으로 길러내는 것이었다. 1924년 미국의 언론인은 당시 교육 시스템을 이렇게 요약했다.
"공교육의 목표는 계몽화가 아니다. 현재의 공교육은 가능한 한 많은 개인들을 똑같은 안전 수준으로 강등시키고 표준화된 시민을 길러내고 훈련시키면서 반대 의견과 독창성을 억누르고 있을 뿐이다. 이는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에서의 공교육이 내세우고 있는 목표다."
<평균의 종말> p.85
공교육이 테일러주의 공장처럼 돌아가도록 가장 기여한 인물은 손다이크였다. 손다이크는 골턴의 계층 개념을 옹호했으며, 한 가지 일에 재능이 있는 사람은 다른 대부분의 일에도 재능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론에 공감했다. 그런 손다이크에게는 학교의 목표는 모든 학생을 똑같은 수준으로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을 타고난 재능 수준에 따라 "분류하는" 것이었다. 손다이크의 "분류" 시스템은 전세계적인 학생 등급화 시스템을 세우고, 명문 대학 입학시험의 체계를 잡는 데 일조했다.
경제와 교육은 모두 시스템을 위해 존재했다. 그리고 그 시스템에 잘 적응하는 인간을 걸러내기 위해 우리는 그동안 "평균"이라는 개념을 채택했다. 평균 중심의 표준화가 표준화된 결과를 보장해 주기 때문만이 아니라 학생 각자의 평균편차를 측정하기가 더 쉬워지고, 그에 따라 우등생이고 누가 열등생인지 가리기 더 쉬워지기 때문이기도 했다. 경제적 성과를 위한 효율성과 편의성. 평균주의 사회가 된 가장 큰 이유였다.
이 책을 읽으며 대학원에 입학해서 첫 학기에 배운 <이상심리학>이 생각났다. 이상심리학은 미국 정신의학회에서 발간하는 『정신장애의 진단 및 통계 편람』즉, DSM-5의 정신장애 분류체계에 따른 내용을 다룬다. 우리가 우울증, 공황장애, 발달장애, 치매 등으로 진단받는다고 하면 이 DSM-5에서 말하는 기준을 만족해야 한다. 내가 그 당시 눈여겨 본 부분은 DSM-5의 정신장애에 대한 분류 방법이었다(출처: 권석만 저 <이상심리학>).
정신장애에 대한 분류 체계는 '이상행동과 정상행동의 구분을 양적인 문제로 보는가 아니면 질적인 문제로 보는가'에 따라 범주적 분류와 차원적 분류로 나눌 수 있다. 범주적 분류(categorical classification)는 이상행동이 정상행동과는 질적으로 구분된다고 본다. 비정상은 정상이 가지지 않는 특정한 원인을 가지고 있으며 정상과 비정상은 섞이지 않는다. 따라서 범주적 분류는 흑백논리적 분류의 특성을 가진다. "A라는 환자가 나타내는 증상이 우울장애인가, 우울장애가 아닌가?"라는 물음만이 가능하다. 차원적 분류(dimensional callsification)는 정상행동과 이상행동의 부적응 정도에서 양적인 차이가 있을 뿐 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는 가정에 근거한다. 따라서 차원적 분류에서는 어떤 심리적 증상을 나타내는 사람을 특정한 장애로 분류하기 보다 부적응을 평가하는 몇 가지 차원에 위치시킬 수 있다. 예컨대, 우울장애의 증상은 정도의 차이만 다를 뿐 누구에게나 존재할 수 있으며 우울장애를 지닌 사람들도 증상의 정도가 각각 다르다. 또한 우울장애 환자들은 흔히 불안 증상을 함께 나타내기도 한다(권석만 <이상심리학> p.116~117).
쉽게 말하면, 범주적 분류에서는 정상과 비정상(장애)를 질적으로 구분하고, 차원적 분류는 누구나 심리적 증상을 가질 수 있으며 양적인 차이가 날 뿐이라고 가정한다. 어떤 분류법이 인간의 심리적 증상을 더 합리적으로 설명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설명을 듣는다면 차원적 분류가 더 합리적이고 본질적인 설명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상심리학> 책에서도 장애의 실제적인 특성은 차원적 분류를 적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인정하다. 하지만 현실적 실용성의 측면에서는 범주적 차원이 유용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현재 널리 사용되고 있는 정신장애의 분류 체계는 주로 범주적 분류 방식을 따르고 있는 실정이다. DSM-5 체계도 마찬가지이다(물론, 이번 개정으로 차원적 분류 방법이 살짝 도입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기본은 범주적 분류다).
범주적 분류 방법으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하다. 그 기준의 개념에는 당연히 "평균"의 개념이 포함되며 평균은 이상행동을 보인 사람들의 심리검사 결과를 통계화된 값일 것이다. 이 평균값에 가까스로 미치지 않으면 정상, 가까스로 넘기면 장애로 진단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저자의 말대로 평균이 허상에 불과하다면 이러한 정신장애의 진단 방식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물론 진단의 "현실적" 편의성과 유용함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심리검사나 정신 장애 진단 결과가 자신에게 마치 전체의 진실인 것처럼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결과를 전달하는 방법이라도 달라야 하는 것 아닐까?
상담자가 심리검사를 실시하며 해석할 때 내담자들은 취약해진다. 자신이 문제 있는 인간으로 심리검사에서 증명될까 봐 걱정하고 불안해한다. 각종 수치와 통계, 표로 정리된 검사 결과는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권위를 가진다. 평균이나 정상에 가까운 사람이 아닐까 봐 노심초사해 한다. 하지만 이 수치가 결코 그 사람 전부를 설명해 주지 않는다. 그저 일부의 진실이며, 퍼즐의 한 조각일 뿐이다.
장애 진단이나 심리검사의 유용성과 도구로서의 힘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결과를 해석하고 전달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본질적인 의미를 먼저 이해하고 그것을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정신장애 진단이나 심리검사 결과를 해석할 때 이 결과가 "당신의 전체를 설명하지 않아요, 일부일 뿐입니다."라는 설명 후에 결과를 들려준다면 어떨까? 아마도 조금은 더 안심하지 않을까. 그래야 진단이나 심리치료 결과가 "낙인을 찍는 인두"가 아닌 "치료하는 도구"로서 본연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심리상담도 마찬가지이다. 분석적으로 상담을 하시는 분들 중에는 그들이 제공하는 해석이 내담자에게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가 있다. 내담자에게 그러한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상담자는 내담자를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잘 안다고 해서 반드시 치료적인 것은 아니다. 마치 의사가 암의 원인은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만 치료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저자는 ADHD로 진단을 받았으며 고등학교 때 모든 미국 학생들이 받는 표준화된 적성검사를 받은 적이 있다. 그 결과에 대한 저자의 생각과 느낌을 길지만 그대로 인용해 보고 싶다.
"나는 고등학생 때 미국의 대다수 대학에서 입학 심사 기준으로 폭넓게 사용 중인 표준화된 대입 적성검사를 받았다. 손다이크가 봤다면 이 적성검사를 아주 마음에 들어 했을 것이다. 해당 학생의 등급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그 학생이 들어갈 대학을 고를 경우 이 등급이 여러 대학에서의 학업 수행력을 예측하는 척도로도 활용되니 왜 안 그렇겠는가. 나는 지금껏 이 적성검사 결과와 관련된 것을 모조리 잊어버리려 안간힘을 썼지만 그 기억은 충격적 경험의 고통스러운 잔상처럼 지금도 여전히 나를 쫓아다닌다. 아무튼 이 적성검사는 성적에 따라 나를 골턴이 '평범층'으로 지칭했을 법한 대열에 올려놨고 그 성적을 바탕으로 내가 유타주 오그던의 개방 입학 학교 웨버 주립대학교에서 B 이상의 학점을 받을 확률이 40퍼센트라는 기운 빠지는 정보를 알려줬다. 예상 확률을 읽으며 내 앞길이 캄캄해지는 것만 같았던 그 순간의 기분이 아직도 생생하다. 표로 말끔히 정리된 그 예상치에는 근엄한 수학적 권위가 부여돼 있긴 했으나 그럼에도 억울했다. 한 번의 검사로 인간으로서의 나의 전체 가치를 측정한 뒤에 나를 모자란 부류로 판단 내린 것 같아서였다. 원래 내 꿈은 엔지니어나 신경학자가 되는 것이었지만 가능하지 않아 보였다. 그것은 정말로 어림도 없는 환상 같았다. 적성검사가 내 꿈을 북돋워주기는 커녕 나에게 엄숙한 선언을 내렸다. 차라리 평균으로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지는 편이 낫다고. "
<평균의 종말> p.90
하버드에서 교수를 하는 지금도 그 적성검사 결과의 잔상이 그를 괴롭힌다는 점이 씁쓸하고 한편 섬뜻했다. 가족치료 이론에서 매우 유명한 보웬이라는 심리학자는 정신분석의 개념을 사용해서 조현병 환자와 가족들을 연구하고 치료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조현병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양적으로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ADHD, 자폐, 조현병...이런 이름들이 나와는 너무나 다르게 느껴지는가? 깊이 들여다보면 나도 산만할 때가 있고, 혼자만의 세계가 있으며, 분열적인 사고를 할 때가 있지는 않은지.
우리 개개인은 모두가 고유하다. 우리는 고유하기 때문에 존엄하다. 평균은 허상이다. 단지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일 뿐이다. 그러니 다시 생각해 보자. 나와 너, 우리는 평균적 인간이라 할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이 사람을 '살게 하는지'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