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여러 가지 측면과 원인들이 있지만, 부모-자녀 간의 분노가 대물림될 때엔 '공격자와의 동일시' 기전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무력한 아이일 때 부모에게 맞고 자란 아이들은 부모에게 분노를 표출하지 못했다. 내 세상이었던 부모가 나를 공격하는 두려움은 아이에겐 세상이 무너지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그 아이가 성인이 된 뒤에는 자신이 사랑받지 못한 아이였다는 수치심과 불안을 숨기기 위해 공격자였던 부모와 나를 동일시한다. 학대가 대물림되는 가정에선 이런 공격자와의 동일시 기전이 작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도널드 위니코트는 아이의 공격성으로부터 엄마(부모)가 살아남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위니코트는 프로이트나 클라인과 달리 아이가 공격성을 본능으로 타고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오히려 공격성이 창조성의 동력이 된다고 보았는데, 공격성이 창조성의 동력이 되기 위해선 아이의 공격에 엄마가 살아남아야 한다.
엄마가 아이의 공격성으로부터 살아남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정신분석학자 월프레드 비온은 이를 "담아내기(containing)" 개념으로 설명했다. 아이의 분노와 공격성을 엄마가 잘 담아내서 아이가 감당할 만한 것으로 되돌려 주는 것을 말한다. 사춘기 아이가 자신의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우리 집은 옷도 별로 안 사준다며 바쁜 아침에 불평과 짜증을 쏟아낸다고 하자. 그럴 때 담아내지 못하는 엄마라면 "네가 호강에 겨워서 별소리를 다하는구나! 그러게 왜 부잣집에 태어나지 그랬니?!"라며 아이를 공격한다. 반면 아이의 공격성을 담아내는 엄마라면 "딸이 짜증이 많이 났네. 옷이 별로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있나 보네. 엄마랑 얘기해 볼 수 있어?"라고 반응할 수 있다(아주 이상적인 경우를 상정). 담아내기 과정을 통해 아이는 엄마가 자신의 공격성에도 살아남고, 견딜 수 있음을 경험한다. 그 과정을 경험하면서 아이는 스스로 정서를 조절하는 과정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바쁜 일상 가운데 이런 일은 매번 일어나진 않는다. 아이에게 항상 그렇게 대할 수 있는 엄마는 없다. 야구에서도 3할의 타율이면 4번 타자를 넘볼 수 있다. 그러니 3할 정도의 성공률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런 경험은 빈도가 적어도 밀도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