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권리를 침범 당했습니다."
분노는 자신에게 이런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내 권리가 침범 당했다는 마음의 격렬한 사이렌. 분노 표출을 시도 때도 없이 하는 분노조절장애는 너무 자주 울리는 사이렌과 같다. 그러나 울리지 않는 사이렌은 어떤가. 내 권리가 침범당했음에도 겉으로는 화를 내지 않는 이들. 조용하고 차가운 분노. 내 안에 차곡차곡 쌓아둔 억압된 분노는 나 자신과 관계에 어떤 영향을 줄까?
억압된 분노는 나 자신을 갉아먹는다. 억압된 분노가 마음속에 오래 자리 잡은 분들에게는 지나친 분노 표출로 인한 분들과는 다른 치료적 접근이 필요하다. 어렸을 때부터 분노를 "억압" 하는데 익숙해진 사람들은 자신의 분노와 접촉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상담자가 들었을 땐 분명히 화가 백 번이 나고도 남았을 상황인데 "그때 정말 많이 화가 나셨겠어요."라고 감정을 읽어줘도 "화가 나진 않았어요. 저희 엄마 아빠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 이해하고 넘어갔던 거 같아요." 같이 억압하고 합리화한다.
분노는 타인을 향한 감정이지만 우울은 자신을 향한 감정이다. 억압된 분노는 만성화된 우울을 초래하기 쉽다. 몇 년 전 집단상담에 참여한 적이 있다. 상담자들이 모인 집단상담이었는데 그중 한 분은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남편에게 따지지도 않았고 자신도 그냥 넘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시종일관 웃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나가는 그분의 모습에 집단원들 모두 답답함을 느꼈다. 집단 리더는 집단원 한 명에서 남편의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했고, 그분은 남편 역할을 하는 집단원과 마주 않아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이야기를 풀어냈다. 침묵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리더는 분노 감정을 더 표출할 수 있도록 촉진했다. 남편에게 점잖게만 표현하는 내담자보다 더 증폭된 감정을 표현하고, 리더는 그녀를 대신해 소리 지르고 욕을 해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분도 함께 소리 지르고 욕을 했다. 비명과 욕이 정말 시원하게 느껴졌다. 이어서 그녀는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나는 아직도 가끔씩 그녀의 울음소리가 생각난다.
그분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 남편과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자신의 억압된 감정을 안전한 집단 안에서 마음껏 풀어본 것만으로 표정은 처음보다 훨씬 편안해졌다. 비밀을 품고 사는 것도, 분노를 억압하는 것도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젠 그전보다는 그 에너지를 덜 써도 되니 표정부터 편안해졌던 건 아닐까.
화가 났을 때 가볍게 넘기지 않았으면 한다. 분노라는 사이렌을 무시하지 말자. 분노라는 감정은 무조건 없애야 하는 감정이 아니다. 분노에 잘 접촉하는 사람은 그만큼의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방향만 잘 잡아주면 된다. 오히려 분노를 꾹꾹 억압한 사람들은 에너지가 약해서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니 분노를 없애려고만 하지 말고 찬찬히 들여다보자. 화를 내는 데에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