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임약과 미레나
그곳은 대부분의 여자들에게 공포의 장소이다. 특히 굴욕의자라고 불리는 진료실의 의자는 정기검진 및 어떤 목적으로든 수년간 다녔어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산부인과 선택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실력도 물론이지만, 의사 선생님의 환자를 대하는 태도가 된다. 다른 과더라도 물론 그러하겠지만 산부인과라는 특성상 병원에 가는 것이, 몸이 아픈 데서 오는 우울함과 상실감을 제쳐두더라도, 지옥불에 떨어지는 것 마냥 공포와 거부감에 더해, 수치심에서 오는 심리적인 고통이 크기 때문에, 얼마나 편안한 마음이 들도록 응대해 주느냐는 특히 중요한 한 요소가 된다.
어쩔 수 없이 병원과 친해져야 했다. 철분제를 꾸준히 처방받은 대로 먹으니 수치가 점점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피는 많이 흘렸고 배는 아팠으며 단 하나의 믿음(=진통제)으로 견디고 있었다. 이식증만 없어졌을 뿐 놀랍도록 다른 빈혈 증상들은 그대로였다. 평소에도 여전히 나는 걸어 다니는 시체 같은 체력을 자랑했다.
정기검진을 받는 날이었다. 자궁내막에 이상소견이 있으니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검사결과 나는 다른 약을 처방받게 되었다. 피임약의 하나였는데 치료 용도로 처방받아서만 살 수 있는 일종의 호르몬제였다. 병명과 대형병원 출처의 여러 가지 정보들을 찾아보고 검색해 본 결과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으나 호르몬 이상이 의심되는 원인 중 하나라고 했다. 여성호르몬이 정상보다 많이 분비된다거나 균형을 이뤄야 할 남성호르몬이 적게 분비된다거나 하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우선 3개월을 먹어보고 그 후에 반응을 지켜보자고 얘기하셨다.
진통제와 함께 처방을 받고 약국에 들렀다. 처방을 받았음에도 일반 피임약 보다 3배는 비싼 가격에 깜짝 놀라며, 이걸 몇 년을 먹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우울해졌다.
가끔 잊어버리기도 했지만 알람을 해놓고 정해진 시간에 꼬박꼬박 먹도록 계획을 했다. 나는 아침시간에 먹기로 결정했는데, 일어나자마자 카페인을 들이부어야 눈이 떠지는 습관으로 아침 커피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시간이 약간 애매했다. 보통 약 흡수를 방해하는 우유나 커피를 마실 때 2시간 간격을 두어라고 하니 정확하게 2시간은 아니지만 대충 그 정도라 치자하고, 9시에 알람을 해두었다. 밤에 자기 전에 먹을 수도 있었지만, 혹시나 잊게 된다면 수면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아차릴 테고, 그렇게 되면 시간이 많이 지연될 수 있기 때문에 저녁시간은 제외했다.(사실을 고백하자면 주님 때문이기도 했다. 어느 날 어떻게 알코올과 함께 저녁시간을 보내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3개월의 저녁시간을 저당 잡힐 수 없었다. 적어도 삶의 기쁨 하나쯤은 남겨두어야 했다.) 3개월은 생각보다 금방 지나갔다.
3개월 후, 자궁내막에 자라났던 의심스러웠던 것이 사라졌다고 했다. 호르몬 분비에 문제가 있고 약물치료가 효과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약을 몇 년이 될지 모르는 시간 동안 계속 먹을 수 없고, 적정한 호르몬을 분비시켜서 자궁내막을 얇게 만들어 줄 필요가 있기 때문에 미레나를 권유했다. 생리통과 생리과다에도 효과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알고 있었으나 여러 가지 부작용이 무서웠고 기구를 삽입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의사들의 권유에도 수년간 외면하고 있었으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미레나 말고, 다음 순서로는 자궁을 적출하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했다.
부작용이 두렵다고 했더니 의사 선생님의 현명한 말씀,
"한 번 해보고 안 되겠다 싶으면 빼면 되지"
그렇게 미레나를 하게 되었다. 제발 내 몸에 잘 맞아서 수술대에 오르는 일은 없기를 바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