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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s Aug 03. 2021

주성치의 속 내

웃음 안에 슬픔을 담다. (희극지왕)

 한 청년이 있다. 그는 배우이다. 엄밀히 말하면, 엑스트라 배우이다. 어렵게 일을 받은 영화 촬영 현장에서는 부주의로 인한 사고를 치고 쫓겨난다. 그는 현장에서 주는 도시락을 너무 먹고 싶어 하지만 도시락 담당 직원은 그에게 도시락 단 하나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는 동네에서 어렵사리 연기 학원을 운영한다. 학원이 잘 될 리 없다. 정기적으로 학원생들을 모아 공연을 하려 하지만 쉽지 않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수강생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여자 또한 삶이 순탄한 사람은 아니다.

 술 집에서 일하는 그녀는, 손님들을 더 꼬시는 법을 배우기 위해 다른 동료들과 한번 연기 클래스를 듣는다.

그는 사랑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고, 생계를 위해 술집에 나간다.

 그런 그와 그녀는 서로의 입장을 알기에 쉽사리 사랑에 빠지지도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는 큰 영화에서 주연을 맡게 된다.

갑자기 인생이 변화되려는 그때, 영화 내부의 사정으로 그는 다시 대사가 딱 한 마디 있는 역할로 떨어지게 된다. 그는 이를 받아들이면서 영화 대본을 다시 건네주는데 모서리 한쪽을 꼭 움켜쥔다. 대본이 다 찢어질 때까지 그는 모서리 한쪽을 놓질 못한다.


희극지왕이라는 한 오래된 코미디 영화의 줄거리다.



주성치의 영화에는 오묘함이 있다.


 오묘하다. 사전에서는 심오하고 묘하다.라고 되어있다.

그는 슬픈 이야기를 짜 놓고도 자신의 철학과 기법으로 코미디로 표현해 낸다.

처음 그의 영화를 접했을 때, 보는 내내 잔잔하게 웃음을 이어가기도, 몇 차례 빵 터지기도. 그러면서 재밌어서 영화를 쭉 보게 된다. 코미디 자체도 특정 공식을 따르는데 매번 속는다. 자주 터진다. 그러다가 맞는 결말은 또 긍정적이다. 희망차고. 영화가 뭔가 막 개운 한 건 아닌데 뭔가.... 개운하다.  


 나이가 들 수록, 그의 작품들을 다시 보는 데 있어 정말 오묘한 체험을 한다.


 분명히 웃고 있었는데, 그저 웃긴 혹은 우스운 영화였는데, 영화 말미 어디쯤 마음이 애리다. 가끔 청승맞게 눈물도 훌쩍인다. 개운한데, 씁쓸하다. 뭔가. 웃었는데. 마음이 쌉쌀하다.

결코 가벼운 영화가 아니구나. 사람을 이 토록 오락가락하게 만들다니. 묘하다.


 우리는 살면서 간혹 그런 사람을 만난다.

분명히 너무 슬플 텐데, 분명히 너무 울고 싶을 텐데. 괜찮아 괜찮아. 웃자 웃자. 하는 해피 바이러스들.

어렸을 적엔 그런 사람들이 고통에 무감각 한가, 혹은 생각이 아주 긍정적이네 싶었다면 더 자란 요새는 그런 사람들의 곁에 꼭 더 같이 있어주고 싶다. 같이 있어달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같이 있는 시간이 아깝지 않게 자신의 슬픔이 고스란히 전달되지 않게 자신의 슬픔 와중에도 나를 배려하는 따뜻함이 느껴진다.

 괜찮다고 다독여 주고 싶다. 웃고 싶어 할 때, 굳이 그 흥을 방해하고 싶지 않지만. 조금은 진지해지고 슬픔을 충분히 느끼고 싶다면, 더 큰 환영으로 그 슬픔을 같이 맞이해 주고 싶다. 정말. 너의 슬픔이 전달되어도 나는 좋다고 말해주고 싶다. 같이 나누자고.   


 한 동안 오래 빠졌던 영국 드라마가 있다. 언젠간 따로 소개하겠지만, '빌어먹을 세상 따위' 란 드라마 속에서

남자 주인공이 혼자 남겨졌을 때 했던 대사가 있다.

 


"그날 알게 됐죠. 고요함은 사실 울림이 크다는 걸요. 귀청이 터질 정도로요. 고요한 상황에서는 모든 막아내기가 힘들죠."


 어떠한 견디기 힘든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중에 또 혼자 있을 때. 특히 지나치게 고요할 때. 견딜 수 없는 내면에서의 쓰나미 같은 아픔들이 몰려온다. 정말 귀청이 터질 정도로. 속에서 무언가가 쾅하고 터진다. 모든 아픔과 슬픔이 내 안에 다 있었다는 것을 불현듯 다 깨닫게 된다. 시각적으로도, 청각적으로, 심지어 촉감으로도 모든 괴로움이 사방에서 몰려온다. 괜찮은 줄 알고 다 이겨냈다고 생각했는데도 이내 찾아온 고요함에는 여과 없이 무너진다. 막아내기가 힘들다.


 이 처럼 주성치의 영화에서는 더 우스꽝 스럽게. 더 장난스럽게, 그저 더 가벼워 보이듯. 표현 해 낸다. 고요함을 없애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리고 마치 영화를 더 오래 봐달라고, 조금 더 같이 있어달라고 말하는 것 같다. 웃게 해 주겠다고. 슬픔을 전해주지 않을 테니 같이만 있어달라고. 그러다 또 그런 아픔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웃음을 주려는 모습에 위로를 얻어가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영화들은 참 어른 같고 따뜻하다.


 자주, 마음이 울쩍할 땐, 그의 영화들을 찾게 된다.

희극지왕뿐 아니라, 서유기 시리즈. 러키 가이. 식신 등의 영화들도 종종 찾는다.

귀에 꽤나 경박스럽게 들리는 광둥어, 낡은 화면, 가끔은 유치한 유머, 때론 이상하고 괴상한 유머 들 사이에서 고스란히 슬픔을 숨기고 있는 모습을 볼 때, 그 모습이 내 친구 모습 같기도 하고.


꼭 나 같다.


 수시로 나의 안부를 묻는 지인들. 나의 표정 보단 상황을 읽어주는 사람들. 나의 '그럼 그럼 괜찮아' 란 조금 과장된 말투에, 몇 가지 되려 웃겨보려는 나의 유머 시도에 '괜찮을 리가 있니 네가. 억지로 그러지 마'라고 되려 혼내주던 그 친구들에게 문득 감사한 오늘이다.   

 

내 고요함을 방해해 주는 주변 많은 지인들에게

많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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