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bler Nov 19. 2020

폰은 전화가 아니고 자료는 종이가 아니다

20세기에 배우고 21세기에 살기_03

가끔 친정에 가면 엄마가 핸드폰을 내민다. 이미 오랫동안 쓰고 있지만, 여전히 업그레이드나 데이터 용량 초과 경고 등 평소와 다른 안내가 오면 돈 더내야 하나, 뭐 고장 났나, 당신이 잘못 썼나 싶어 안절부절못하다가  SOS를 요청하는 거다. 물론 그동안 어지간하면 직접 해보려고 했지만, 고객센터 ARS나 상담원, 홈페이지 문의 등은 심신을 지치게 하고 예전 같지 않은 스스로에게 마음만 상하게 할 뿐이라 살갑지도 않은 딸이 오면 겸연쩍게 부탁하는 것이다.  


초창기에는 나도 사용방법도 가르쳐 주고 엄마도 신기해하며 신문물을 배우려는 의욕을 보였다.

하지만 엄마의 신체 반응은 느렸고, 과정의 인과 관계를 이해하지 못해 내 설명을 끊고 질문했다.

이에 참을성 없기도 했지만 스스로도 어설픈 상담자는 왜 그 질문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을 왜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질문을 하는가. 이게 뭐가 어렵고 복잡한가.   


분명히 인류의 편의를 위해 과학이 발전하는 것일 텐데, 그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몰랐던 새로운 기능을 숙지하고 거기에 파생되는 다른 불편함까지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곳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고기를 잡아주지 말고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라고 하는 조언은 이미 부모가 고기 잡는 것을 보고 자란 아이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고기를 잡는 도구에는 낚싯대와 그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낚싯바늘과 찌를 준비하는 것을 도와주고 어떤 날씨에는 바다에 나가지 않는 것을 본 아이들은 자연스레 고기 잡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바다라고는 본 적 없이 산에서 산짐승을 사냥하는 환경에서 큰 아이에게는 고기는 생선이라는 전제조차 없다.  


해안가에 처음 시집온 산골처녀처럼, 엄마가 신기술의 속도를 쫓아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좋다는 것은 알겠는데, 이제는 쓰면 좋은 것이 아니라 당연히 써야 한다는데 활용하기 위해 배워야 할 것은 너무 많았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한번 혹은 두 번 배워 사용한다고 끝나지를 않는다는 거였다. 이제 엄마는 문자와 카톡을 구분해서 보낼 줄 알고, 손주 사진도 찍어보고 꺼내보고, 동영상도 즐기며 만족하고 있는데, 자꾸 또 뭔가 새로운 기능을 쓰라하고 기계 바꾸라 하고 업데이트하라 하고 여기저기에서 귀찮게 하는 거다. 심지어 어떤 경우엔 기껏 배웠더니 '이 기능은 더 이상 서비스하지 않습니다'라며 뒤통수를 치기도 한다! 

정작 엄마가 쓰면서 불편했던 점은 개선되지 않고 그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더 불편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말이다. 


사용에 어둔하니 자존심 상한 엄마 입에서 '나도 예전엔 잘 나갔었는데' 볼멘소리가 나올 수밖에. 엄마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잘하던 것이 한두 가지였나. 하지만 주변의 칭찬과 부러움을 사던 그녀의 미덕은 21세기 신문물을 사용하는 데에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나마 삐삐로 연애하고 폴더폰으로 통화하고 문자하고 인터넷도 좀 써본 우리가 충격흡수 쿠션을 감고 있던 거였다. 


몇 년 전 사무실이 이사할 일이 생겼다. 이사를 준비하는 TFT가 꾸려졌고, 도면을 검토하고 필요한 시설과 설비 등을 논의하는데 논쟁거리 중 하나는 부서별 자료창고였다. 개별 창고를 사용했던 부서들은 무조건 규모를 반 이상 줄이거나 없애라는 엄명을 받았고 현업 부서장들은 패닉이 되었다. 샘플과 팸플릿을 쌓아두었던 마케팅 팀과, 프로모션 용품들과 구형 미디어 자료들이 빼곡한 홍보팀의 어필은 무효했고, 난공불락의 회계팀 감사자료조차 지방 사업장으로 보내져야만 했다. 클라우드에 올릴 수 없는 모든 것들은 인정받지 못했다. 무생물로서 임대료 비싼 건물에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것은 IT 시스템을 관장하는 하드웨어들 - 난 여전히 그 이름들은 모른다 - 뿐이었다. 


그동안 모아두었던 인화지 사진, 필름, 문서, 사보들을 꺼낸 홍보팀장이 말했다.


"사사에 필요할 것이라고 선배에게 전달받은 대로 모아 두고 더했는데, 팀원들이 보더니 다 버리자고 하더라구. 어디다 쓰냐고. 이거 없어도 사사 못 만들겠냐면서. 뭐라고 반론을 못하겠더라. 나 스스로도 반신반의했던 것 같아. 귀중하다고 무슨 임금님 옥쇄받듯 받아 뒀는데 솔직한 마음으로 먼지 쌓인 슬라이드 필름이랑 베타 테이프 보면서 난감하더라구." 


결국 해당부서들은 자료화가 가능한 것은 모두 작업하여 온라인 자료실로 이관하고 TFT팀은 자료창고를 줄여 확보한 공간으로 직원들이 원했던 쾌적한 모바일 오피스 공간과 통신 시스템,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근사한 온라인 플랫폼도 제공했다. 


웃픈 것은 먼지 쌓인 옛 자료를 온라인으로 옮기고 향후 편리하게 사용하기 위해 전문가들이 플랫폼을 론칭했지만, 우리가 그 자료를 보기 위해서는 검색 방법을 배우고 저장 파일 뷰어를 다운로드해야 했다는 것이다. 무언가 메모를 하거나 편집을 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며 교육이 추가되었다. 할 수 있다면 다행이고, 그렇지 못하면 엄마가 딸에게 하듯, 후배 직원을 불러 시키는 꼰대가 한 명 더 느는 것이다. (엄마는 바쁜 딸에게 이런 부탁하는 것을 미안해하기라도 하는데) 20년전 손글씨 빽빽하게 쓴 종이를 가져와서 워드 파일로 만들어 달라하시던 부장님도 생각난다. 


이번 이사 후 온라인 플랫폼을 잘 사용한다고 안심하거나 자만하지 말자. 다음 업그레이드는, 다음 신상은 자신할 수 없을 터이니. 


곧 IT팀은 업그레이드를 거쳐 신규 플랫폼을 도입할 테고, 신입사원은 구 버전으로 저장된 파일들을 찾아내지 못하거나, 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우리의 역사는 사라진다. 전쟁에 패해서가 아니라 신문물에 담겨지지 못해서. 


엄마는 문자 하는 법을 연습하자 했더니 몇 번 하다 말고 "얘, 난 그냥 말하면 문자로 찍히는 거 나올 때까지 그냥 전화할래" 하시더니만, 친구분들 등쌀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카톡에 입문하셨다. 오래전에 음성 문자 기능 생긴 것은 모르신다. 알면서 또 배우기 싫으신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제 나는 10대 아들의 게임 세팅 속도를 못 따라가서 핀잔받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전 03화 E.T를 닮은 당신_요즘 어떤 운동하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