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수시 원서를 쓰는 기간이 되었다.
쓸 수 있는 원서는 6개 플러스 알파.
(카이스트와 -ist로 불리는 전국 과기원들은 6개에 포함되지 않으니 추가 지원가능하다.)
가능한 전형은 교과, 종합, 논술.
최대한 많이, 다양한 전형을 섞어야 하는 것이 정석인데 이과아들의 생각은 명료했다.
서울대 그리고 혹시 모르니 연대 하나는 추가.
행여 둘 다 떨어지면 정시로 갈 것이니 엄마 마음대로 더 쓰든가 말든가.
재수할 생각은 없다는 녀석이 무슨 배짱인가.
납치는 싫다. 자소서 쓰기 싫다. 논술 준비도 싫다.
음..... 무지한데 용감한 현역 맞습니다.

심지어 이과아들이 원하는 과는 영과고 아이들이 가는, 일반고에서는 피하라는 과였다.
설명회 끝나고 1시간 줄 서서 물어본 대치동 유명 컨설턴트는 말했다.
어머님, 어떻게 해서라도 그 과는 말리세요.
그 와중에 원서 쓰기 직전에 보란 듯이 언론에서 국제 올림피아드 수상 기사가 줄줄이 떴는데 거기 나온 고3들 명단만 해도 이미 모집인원 정원이 다 찬 것을 보고 어미는 거의 얼어붙었다. 엄마가 아들을 믿고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지원 학과에 대한 플랜 B가 필요했다.
6개 지원 원서를 채우기 위해 분석과 리서치를 하면서 들은 주변 의견과 방향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1. 우선 수시에 붙입시다 - 일반고는 차라리 모집인원 많은 공대가 유리하니 변경해서 지원.
2. 생기부 내용이 일관되니 원하는 과에 넣어 봅시다. - 설사 수시로 안되더라도 수능 점수가 현 모고 정도로만 나오면 정시로 재지원 가능하고 상위 과도 가능.
이과아들은 수능에 대한 자신감을 보이며 당연히 2번을 주장했고, 문과엄마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마음이 바뀌었다. 현역이 수능 당일 제 실력을 못 낸다는 이야기를 정말 너무 많이 들었는데 나의 아들은 뭘 믿고 저리 자신만만한가.
결국 가능한 한 수시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인원 많은' 과는 아니지만 공대의 과를 하나 골라낸 아들은 더 이상의 양보는 없다면서 대신(?) 남은 원서는 엄마 마음대로 쓰라고 최후통첩을 했다.
사실 원서를 작성할 때 미묘하게 어려운 부분이자, 다른 이들과 이야기하기 어려워 익명의 인터넷 입시카페만 불이 나는 이유 중 하나는 학교와 학과 선택이 단순히 개인의 희망 진로와 꿈만으로 아름답게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적에 맞는, 아니 내 성적으로 갈 수 있는 최대한의 상위권 학교를 선택하고자 하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수시원서는 아직 보지도 않은 정시 수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경우의 수가 너무나 넓고 크게 잡히는데 또 의외로 소위 '갇힌' 점수대에 걸려서 6개 원서 채우기가 어려운 경우도 있으니 이건 이것대로 답답한 상황이기도.
대략적으로 리스트를 추린 후 최종 점검 겸 놓친 다른 카드가 있을까 싶어 한 번만 가보자 했던 사설 컨설팅에서 컨설턴트의 첫 질문에 아이는 순간 당황해서인지 본심이었는지 예상치 못했던 답변을 했다.
만일 수능에서 지금 성적 이상, 만점 받아도 여기 지원할 거니, 메디컬 안 하고?
어.... 생각해 볼 것 같아요.
본투비 공대 체질이라고 모두가 믿었던 지인 아이가 정시로 의대를 가더라니. 이렇게 시작인 건가.
컨설턴트는 황당해하는 어미를 보고 말했다.
요즘 다 그래요. 아닌 것 같아도 어쩔 수 없어요.
결국 이제는 수능에 집중하라 하면서 가장 고민이었던 서울대는 결국 사설 컨설턴트들이 추천한 과가 아닌 이과아들의 선택으로 결정하고 연대 학종과 의대 논술을 섞어 6개의 리스트를 채웠다. 교과 안 쓰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의대 논술이 낯설기도 하고 걱정되어 수능 후 면접인 학종을 하나라도 더 써볼까 하는 모성애에 컨설턴트는 한마디로 입을 막았다.
지금 이 아이가 가겠어요? 거긴 안 갈 건데 뭐 하러 써요.
힐끗 쳐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아닌 척하며 슬쩍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아이가 가고 싶은 학교와 과를 지원할 수 있다는 것에 안도하면서도 그 과정이, 이 불안하고 팔랑거리는 마음이 맞나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진학사와 유웨이를 켜고 결제하는 순간까지도 아들은 논술도 안 간다며 돈 버리는 거라 놀렸지만, 엄마 마음은 어디 그런가. 그래, 논술 안 가도 되도록 수능 망하지만 말자. 지원은 우리 마음이었지만, 이제는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란다. 이제 실전이다.
아유~ 공부 잘하는 데 무슨 걱정이야?
최상위권/상위권 학생들과 그 부모들이 종종 듣는 말이다. 잘난 척이나 호강 겨운 소리가 아니라 진심으로, 이런 말을 한 번이라도 들어본 수험생 엄마라면 이해할 것이다. 입시판에서는 할 수 없는, 해서는 안 되는 말이라는 걸. 유튜브를 조금만 보아도 1점대가 6 광탈하는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변수가 너무나 많고 정교한 이 입시 시스템에서는 1.0을 받아도 전교 1등이라도 (물론 이과아들은 둘 다 아니다) 원서를 어떻게 쓸 것인가, 원하는 학교에 합격할 것인가는 알 수 없고 그 고민이 덜 깊다고 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인간의 욕망이 개입된 선택은 객관적이기 어렵다. 부모는 아이의 미래가 달린 일이기에 정성을 쏟지만 그 정성의 방향이 옳은지는 아무도 모른다.
알고 계셨나요? 수시 납치
수능점수를 반영하지 않거나 최저만 맞추면 되는 수시전형을 썼는데 수능점수가 생각보다 잘 나오는 - 수시지원한 학교보다 좋은 학교 지원이 가능한 - 경우가 아주 가끔 있다. 이런 경우 수시 합격자는 정시 지원 자격 자체가 안되기 때문에 내 인생 커리어 하이 수능점수는 무용지물이다.
수시 지원할 때 정시 지원을 생각하지 않고 쓰면 안 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이자 (수능을 아예 안보는 선택을 하는 영재고 출신들은 제외하고) 안정권을 너무 낮춰 썼다가 아쉬워하는 경우가 이래서 생긴다. 물론 모의고사보다 수능이 잘 나오는 경우는 매우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수시원서 쓸 때와 수능 후 마음이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우주 상향도, 땅속 안정도 아닌 그 사이 어드메쯤 지원하는 것이 원서 영역의 난이도이다. 더 안타까운 경우는 해마다 수시 (특히!) 추가합격된 것을 모르고 정시를 지원하는 경우인데, 이중등록과 마찬가지로 둘 다 무효처리 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추가합격 마지막 라운드까지 확인해야 하는 것이 전화했는데 못 받고 안 받고 넘어간 경우도 학교에는 합격으로 기록되어 있어 정시 지원을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