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시 최초합 한 장으로 이과아들의 입시는 끝났고 본인은 아주 개운하고 편안한 얼굴로 먹고 자는 생활에 들어갔다. 수능점수 아깝네 어쩌네 하던 말들은 쑥 들어갔을뿐더러 게임과 유튜브도 다 털었는지 엄마의 OTT 계정을 받아가서 침대늘보가 되었다. 사실 수시를 붙어 정시 지원자체가 안되니 고민할 것도 없었고 재수는 계획에 없었기에 이제 졸업식과 대학안내만 기다리면 되는, 아무것도 안 하지만 더더욱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기간이었다.
속이 시원하면서도 정시 예상지원 프로그램을 잔뜩 쇼핑(?!)한 엄마만 약간 머쓱했다. 수시 결과를 반신반의했기에 수능 점수를 프로그램에 넣어보면서 가나다 군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확정된 수능점수를 학교별로 넣어보며 판을 익혀야 할 차례였는데 이과 아들과 비슷한 사례 질문이 온라인 카페에도 쏟아져서 흥미롭게, 그리고 복잡한 심정으로 보던 중이었다.
이과아들의 수능 점수는 수시 합격한 과에는 남고 지방의대를 포함한 수도권 약대가 걸린 점수였다. 정시를 쓴다면 의대를 썼을까? 서울대 약대와 공대 어디를 썼을까? 다양한 전형으로 자유롭게 쓸 수 있는 6개의 수시원서와 달리 군별로 3개를 선택해야 하는 정시는 그 고민의 깊이가 달랐다. 특히 이과아들과 비슷한 상황인 스카이 vs 지방 의대, 약대에 대한 질문에는 엄청난 댓글이 달렸는데 대부분 90퍼센트 이상이 메디컬을 가야 한다는 거였다. 입시생은 물론이고 의사 약사 대기업 연구 임원 부모님들까지 모두 가세해서 달리는 댓글에 여러 생각이 들었다.
수시와는 결이 다른 판.
생기부 내용이나 과거와는 상관없이 수능 점수를 가지고 줄을 서야 하니 높은 입결의 학교와 전공이 우선이었다. 전공 위에 학교, 문과 위에 이과, 학교 위에 메디컬. 견고한 메디컬의 성.
요즘은 학교 이름보다 전공이지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메디컬이 아닌 담에야 아이들은 예전보다 더 학교 이름과 서열에 집착하는 것 같았다. 전공에도 서열이 있었다. 높공과 낮공의 뜻을 이때야 알았다.
이런저런 입결추이를 보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방에 보낼 생각이 없었음에도 의대라는 말에 흔들렸고
물리, 지학을 선택한 주제에 같은 학교라면 이왕이면 약대인가 라는 의문이 안 생길 수 없었다.
정말 교묘한 가스라이팅이 난무하는 입시판에서 연초까지만 해도 잘난 척 올바른 척 입바른 소리를 해대던 T 엄마는 어디 가고 팔랑귀만 남았다. 예전에 수능점수를 다 쓰지 못하고 간 학교로 자기를 평가하는 것이 싫다던 친구 아이의 말을 이제야 이해하고 실감했다.
만일 수시에 불합격하고 정시 지원을 했다면 점수가 남는 것을 감안하고라도 기존에 원하던 학과를 썼을까? 아니면 메디컬을 썼을까?를 두고 남편에게 매일 밤 물었다.
이과 아들은 진즉에 쓰지도 못할 거 왜 묻냐고 원천 차단을 한 터였다.
괜한 에너지 소비에 수시에 합격했으니 어쩔 수 없지라고 접으려던 찰나, 이 징그러운 입시판은 내 발목을 다시 한번 잡고 물었다.
아니 이 점수로 왜 재수를 안 해요?
네?????
남는 점수 아깝잖아요. 재수하면 바로 인서울 의대 가겠구먼.
그랬다. 서울대를 제일 많이 보내는 학교는 연대, 의대를 제일 많이 보내는 학교는 서울대라는 웃픈 유머가 먹히는 곳이 바로 입시판이다.
이미 재수가 일상인 곳. 물론 입시영역 전략실패로 재수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지만, '붙여놓고 재수'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지 오래다.
온라인은 물론이고 특히 강남서초지역은 이미 오래전부터 고3들의 반 이상이 재수를 감안하는 분위기라서 졸업 후 재수종합학원에 갔던 사촌형도 동창 대부분이 다 여기 와있다고, 학교 다닐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했던 말이 기억났다.
3년 생기부와 상관없이 정시로 의대 간 선배도 수두룩하니 이번에 수시최초합 한 친구도 다니던 학원에서 한 번 더해서 의대 보내자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학교 선생님 마저 공대와 의대를 둘 다 붙어 공대를 갔는데 후회하고 다시 의대 간 선배 이야기를 해주셨고, 어떤 정시 예측 프로그램에는 주요 대학과 함께 2 top 재종학원이 같이 떴다.
이과 아들의 수능 점수를 알게 된 주변인 대부분이 재수트랙에 오를 것을 예상하며 이 정도면 대치동 학원에서 장학금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라 했다. 재수학원 장학금도 처음 들었는데, 워낙 상위대학 합격자 아이들이 많아서 경쟁이 치열하다는 말에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의대 가스라이팅에 이어 재수 가스라이팅이 계속되니 판단력이 흐려지고 하루에도 열몇 번씩 마음이 바뀌었으나 결국 마음을 접었다.
49퍼센트의 마음으로는 의대를 갈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보내면 해낼 것 같긴 했다.
다만 51퍼센트의 마음으로 재수도, 의사도 좋아서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당장 이과아들은 논술의 기회도 거절했고 재수도 생각이 없었다. 먼 미래를 보고 결정한 것은 아닌 건 확실하니 이걸 부모로서 세상을 아직 모르는 어린아이의 치기라며 의대로 이끌어 주어야 하는 걸까.
의대를 가라고 강요하는 부모, 의대 혹은 메이저 의대를 위해 재수하고 싶은데 반대하는 부모 모두 아이를 위한 마음은 하나일 텐데. 혹시 부모의 책임과 욕심 사이 그 어디인 것은 아닌지.
2퍼센트 기운 마음이 엄마의 상상인지, 객관적인 판단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우리는 현재의 마음에 충실하기로 했다. 아이가 스스로 의대에 대한 생각이 바뀔 수도 있고, 또 다른 진로를 찾을 수도 있으니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자수컨대, 사실 부모의 경험을 투영해서 결정 내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수십 년 전 내가 겹쳐 보였다. 재수하기 싫은 나는 차선을 지원했고 엄마는 내심 재수하지 않을까, 시킬까 싶었지만 합격 후 재수에 대한 생각이 1도 없어 보이는 내 모습을 보고 마음을 접었다고 했다. 현재 우리 집과 거의 같은 상황이 아닌가. 역시 내 아들이지 라며 생각했는데 이과 아빠도 재수하기 싫어 그냥 붙은 학교 갔다고 실토하며 아이의 선택에 한 표를 더했다. 아... DNA가 확실하구나.
물론 의대를 목표로 하는 친구들을 응원한다. 다만 입시를 경험해 보니 이와 동시에 무리에 휩쓸리지 않고 다른 전공과 학교를 목표로 하는 친구들도 같은 마음으로 응원한다.
이번 글은 의대도 재수도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부모가 무리에 이끌려 그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온 경험과 구구절절한 변명에 다름없다.
다양한 재수의 길
고3 때부터 장기전략으로 재수를 생각하는 경우, 수능을 본 날부터 재수 체재 돌입하는 경우, 원서 쓰다 결정하는 경우, 설 지나고 기숙 들어가겠다는 경우, 대학 등록 후 마음이 변하는 경우 등등 재수로 향하는 이유와 방법은 너무나 많다. 심지어 인서울 의대생인 지인자녀왈, 의대에서도 아예 안 나타나거나, 봄에 슬슬 사라지는 동기들이 꽤 있다고 한다.
대학들의 고민도 신입생들의 자퇴라서, 단순히 우수한 학생 선발이 아니라 학교를 안 떠나고 공부할 지원자를 뽑는 것이 관건이라 하고, 어느 대치동 강사는 아이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재수를 선택한다는 걸 짚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원하지 않는 대학의 학적보다는 재수생 혹은 n수생이라는 타이틀에 안정을 느끼는 듯해서 좀 안타까우면서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늘어나는 n수생과 그들과 경쟁하기 위해 다시 n수생으로 유입되는 현역의 고리는 언제 끊을 수 있을지. 또한 과거 공무원 시험이나 교대 사범대 시험에도 몰리던 적이 있었지만 이제는 공무원 교사들도 메디컬 시험에 동참하니 언제 이 열기가 수그러들지, 혹은 또 다른 공동목표가 나타날는지 다음 미래는 어찌 될까 궁금하다. 새로 도입되는 지역의사제와 계약학과들이 앞으로 아이들의 진로 선택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