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과 첫 아이의 어린이집 적응기
취업 전에는 나를 써주는 곳이 없을까봐 걱정했는데 취업 후에 제일 문제는 등하원이었다.
보통의 회사들은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는데 내가 그 시간에 회사에 있으려면 시옷이는 적어도 8시 30분 이전에 어린이집에 가 있어야 한다.
이제 만24개월이 채 안 된 아이를 기저귀도 갈아주고 간식도 챙겨서-6시에 하원하기 때문에 오후 간식은 챙겨 보내야 함- 보내려면 여간 바쁜게 아니었다.
사실 시옷이는 어린이집을 매우 좋아하는 아이여서 그나마 순조로운 편이었다. 어린이집 안 가겠다고 떼 쓴다? 적어도 나는 그런 경우는 겪어보질 못 해서 다행이었다.
이 상황이 얼마나 다행인지 나는 몇 년 뒤 작은 시옷이가 태어나고 뼈저리게 깨달았다.
다만 우리 시옷이는 한창 호기심이 많은 나이라 어린이집 가는 길이 너무 즐거웠다.
미용실 앞 입간판이 돌아가는 것도 신기해
떡집 사장님이 나와서 인사해주는 것도 기분 좋아
신호등 앞 비둘기랑도 아는체 해야 해
자전거가 길바닥에 누워 있으면 그것도 일으켜 줘야 하고
그냥 유모차 태워서 슝 하고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내가 바쁘다고 아이까지 바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파블로프의 개 실험- 학습을 통해 조건 반사를 하게 하자’였다.
핸드폰 알람을 나가야할 시간보다 10분 이른 시간으로 설정해두고 알람이 울리면 시옷이에게 이 시간에는 꼭 나가자고 약속을 여러번 했다. 두 달 정도 학습에 이르렀을 때 아이는 알람이 울리면 신발을 신으러 현관으로 나서곤 했다.
사실, 시옷이가 등원 거부 없이 어린이집에 적응을 잘 한 요인은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어린이집을 이른 시기에 가기 시작한 것.
나는 시옷이 20개월 정도에는 일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목표가 있었기에 13개월부터 어린이집을 보내기로 다짐했었다.
그래서 13개월이 되던 3월에 동네에서 가장 크고 연식이 오래되지 않은 아파트의 가정어린이집을 선택했다.
예상대로 운동장 같은 거실이 아이의 놀이공간이 되었고 3년 정도 된 아파트의 화장실이 아이의 위생공간이 되었다. 게다가 그 아파트에 놀이터는 두 곳이나 돼서 아이는 하원 후에도 깨끗하게 관리 잘 된 놀이터에서 산책을 하고 집에 갈 수 있었다. 그런 곳을 두 돌이 되기 전부터 다녔으니 시옷이는 당연히 가야하는 줄 알았지, 가지 말아야겠다 안 가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을 것이다.
둘째는 원장선생님
시옷이 어린이집은 영유아반 담임선생님외에 원장선생님까지 함께 맡아주셨다. 게다가 원장선생님 성품이 너무나 좋으신 분이라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내 눈으로 직접 느낄 수 있었다. 훗날 아이가 수료를 못 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사가게 됐을 때 아직 세 돌도 안 된 아이에게 편지를 써주셨던 걸 잊을 수 없다. 시옷이가 한글을 읽을 때쯤 원장선생님을 기억할 수는 겠지만 원장선생님은 너를 기억할 거라는 글이 와닿았다. 그런 선생님을 만난 건 내 복이고 우리 시옷이의 복이었다.
셋째는 가장 강력한 요인이었는데 시옷이의 단짝 유이
시옷이를 낳고 나는 산후조리원에 가지 않았다. 친정엄마가 몸조리를 해주신다 했고 우리는 그 당시 가난한 청춘이었기에 한 푼이라도 더 아끼고 싶었다. 덕분에 그 흔한 조동-조리원 동기-이 없다. 그런 시옷이를 나는 백일이 다 될 때까지 혼자서 쓸쓸히 육아를 했다.
그런데 동네 맘카페에 ‘육아맘들 모여요’라는 글이 뜨는게 아니겠는가?
난생 처음 동네 번개에 참여했다가 만난게 유이 엄마였다. 유이 엄마는 나보다 세 살 위 언니고 유이는 시옷이보다 한 달 늦게 태어났고 우리는 살아가는 사정이나 성격도 잘 맞았다.
유이 엄마와 나는 두 아이를 같은 어린이집에 보내기로 약속하고 실행에 옮겼다.
시옷이는 유이와 슬기로운 등원생활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