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친한 동생 주원이랑 살 때 당장 행복할 수 있는 일을 추구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의 행복론은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주의였고, 현재 내가 겼는 불행을 담보로 미래의 행복이 대출이 되듯 생긴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아이패드로 야구를 틀고, 컴퓨터로 축구를 보며 밥을 먹으면 눈 앞에 당장 행복한 일을 하는 주원이를 볼 때 '언제쯤 이 형의 무게를 알까' 생각했는데, 긴 시간이 지나고 알았다. 나는 틀렸고 주원이가 옳았다. 내 행복론은 실패했다. 그래서 몇 년 전까지 행복에 관한 영상, 책들을 보면서 행복의 기원을 찾아 헤매었다. 심지어 주변에 새로 주워들은 행복론을 전파하며 행복전도사로 살았는데, 그 일도 그만두었다. 공허했다.
내가 꼭 행복해야만 하는 이유도 없고, 여러 갈래의 행복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깨달은 여러 갈래의 이야기를 한참이 지나서야 공유를 한다.
[꿈]
10년 전, 29살의 나는 칠레 아타카마 사막 250KM 마라톤을 완주하고 나서 페루 돌아왔다. 6월 말에 열리는 이집트 사하라 사막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페루에 있는 어느 한인식당에서 서빙을 하고 있었다. 내 이야기를 띄엄띄엄 들은 어떤 이는 영화 ‘킹스맨’처럼 겉은 소박한 한식당이지만, 지하 통로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내려가면 극한 마라토너를 훈련시키는 비밀 체육관이 있고, 한물간 마라톤 영웅이 목이 늘어진 셔츠를 입고 기다리는 그런 식당을 예상하던데 그런 거 절대 아니었다. 현실판 킹스맨은 수중에 있는 경비를 아끼기 위해 식당에서 서빙을 하고, 그 대가로 식당 사장님 집 거실에서 침낭 깔고 숙식을 해결하는 열정 빈대 같은 느낌이었다. 아침에 운동을 하고 점심 즈음 식당으로 출근을 했다. 호주 농장에서 일하던 버릇이 있어서 아침 일찍 일어나서 사장님과 같이 출근을 했더니, 나에게 페이를 하지 않고 숙식만 제공해주는 식당 형편 대비 내가 일을 너무 오래 그리고 격하게 한다며 출근을 늦게 하라는 명령 때문이었다. 덕분에 일이 체력적으로 힘들진 않았다.
짧고 긴 식당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내 몸 하나 누울 만한 멀끔한 거실과 베란다가 있었다. 베란다 위에선 페루 동네가 한눈에 보였다. 페루의 서울대인 카톨릭카 대학 전경이 한눈에 보였고, 바로 아래엔 ‘파파이스’ 프랜차이즈 치킨집에 매일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난 그 옆에 허름한 간판의 식당을 좋아했다. 우리나라 돈으로 1600원만 내면 ‘깔도’라는 닭국수를 먹을 수 있었는데, 한국의 백숙과 매우 비슷한 맛이었다. 일할 때 식당 사장님이 말동무도 되어주고 밥도 챙겨줬지만 도전자라는 입장에서 느껴지는 고독은 무엇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1년 안에 사막마라톤 4경기를 모두 완주하겠노라는 결심과 꿈을 이루기에 나는 그다지 용감한 사람도, 여유가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나는 잘하고 있는 건가” 깊은 고민에 한국이 그리워질 때면 그 식당으로 내려가 5 솔(페루 돈) 짜리 ‘깔도’를 사 먹었다. 3 솔을 더 주면 닭다리 하나를 국수에 얹을 수 있었는데, 간판 쳐다보고 지갑 쳐다보고 다시 간판 쳐다보곤 항상 “쏠로 깔도(깔도만 주세요)”를 외쳤다. 면을 다 먹고 닭국물을 후루룩 마실 때 간판에 있는 닭다리 사진을 보며 닭다리도 먹은 셈 쳤다. “어차피 아는 맛인데 괜찮아”.
그리고 밤이 되면 베란다 너머로 노랗고 둥그런 달이 떴다. 거실에 누워 달을 보면서 꿈을 꾸었다. 내 꿈은 당장 배를 채울 쌀을 사주지도 않았고, 안정된 미래를 보장하지도 않았다. 그저 23살 내 가슴을 심하게 흔들었던 꿈같은 일을 현실로 이루고 싶었다. 그냥 꿈을 꿈으로 남기는 게 싫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나중에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듣고 힘을 얻는다면 그걸로 만족하리라 싶었다. 그런 생각들과 거실을 비추는 달빛이면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선물]
예전에 교회에서 동생들이랑 차 마시고 놀다가 근처에 원룸을 잡고 사는 친구가 보고 싶어 단체로 쳐들어가기로 했다. 그 당시 가진 것도 없고 그 친구 집에 간다고 특별히 뭔가를 준비하고 그런 사이도 아니었다. 그냥 동생들이랑 골목골목을 지나다가 바닥에 떨어진 열쇠고리를 발견했다. 발자국에 선명하게 찍혀있었지만 비닐포장이 벗겨지지 않아 손으로 슥슥 닦아내니 금방 새것처럼 변했다. 주머니에 넣고 친구 집에 들어서면서 "옛다. 오다가 주웠다."하고 던져줬다. 난 진실을 이야기했는데 친구는 손바닥에 열쇠고리를 올려놓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눈물까지 글썽였다. "아~ 오버하지 마. 진짜 오다가 주웠다고." 교회 동생들은 이 상황이 웃겨서 침대에 나뒹굴었고, 그 친구는 폭풍감동에 치킨까지 시켜줬다. 난 치킨을 깨작깨작 먹다가 순박함과 어수룩함 중간쯤 어딘가에 있는 친구 모습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선물을 받는다는 건 실로 행복한 일이다. 선물은 다른 말로 ‘나는 당신을 생각합니다’라고 하지 않는가. 모여사는 듯 철저하게 홀로 짐을 지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자신을 생각해주고 찾아와 표현한다는 건 너무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었을 것이다.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행복을 만난다는 건.
[설렘]
" 반장님 이런 떨림 진짜 오랜만입니다. 오우 막 심장이 벌렁거리고 설렙니다."
최강소방관 대회에 출전한 이반장은 자기 차례를 1시간 앞두고 내게 말했다.
"이반장아 너 말 잘했다. 누가 그러더라, 설렘이란 감정이 비싼 감정이래~ 어렸을 때야 소풍 가기 전날이나 짝사랑하는 애 쳐다만 봐도 막 문득문득 찾아왔는데, 나이 들면 앵간한 일엔 마음이 꿈쩍도 안 한다잖아. 그나마 비싼 돈을 들여야 비슷한 감정이 든데, 차를 사거나 해외여행 나가거나 이런 거. 이야~ 설레고 좋겠다. 난 네가 부럽다.”
"아니!!~ 반장님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한 시간 있으면 저 모래통을 들고 계단을 뛰어올라 갈 생각을 하니까#&$@!;”
“응~ 안 들려~" 금쪽같은 조언을 마친 나는 유유히 자리를 떴다.
한 20년쯤 지나면 술잔을 기울이면서 회상하지 않을까
같이 코 흘리던 지금 이 시절이 행복했다고. 설레었다고.
[똑똑똑]
“똑똑똑. 저기 삼촌!” 아침에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문에서 노크소리와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였다. 내가 남원에 조카를 키운 적이 없는데 삼촌이라니. 너무 놀란 마음에 문을 여니 옆집 꼬맹이가 귤 한 봉지를 건네며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쌩 가버렸다.
요는 이렇다. 소방서가 코로나로 회식이 취소되면서 회식비로 마스크를 사서 직원들에게 나눠줬다. 난 딱히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그냥 옆집, 윗집, 아랫집 20개씩 치킨 봉지에 넣어 문 앞에 걸어놨다. 집에 치킨 봉지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아이가 찾아온 것이었다. 집에 들어와서 귤을 하나씩 까먹다 보니 가슴이 몽실몽실했다.
예전에 대학교 화장실에서 누군가의 행복론을 본 적이 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졸~~~~~라게 멀리 있다.”라고. 그땐 큰 용변을 출력하면서 “음.. 그럴 수 있지.” 고개를 끄덕끄덕 했지만, 십 년도 더 지난 지금은 조금 다른 관점이 생긴 것 같다. 행복은 거리가 아니라 빈도가 아닐까 라는 생각. 이런 작은 행복도 자주 느낄 수 있는 삶이라면 그럭저럭 괜찮은 인생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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