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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 소방관 심바 씨 Aug 14. 2021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어느 노인의 자살]

덜컹덜컹 구조차는 신호도 무시한 채 남원 시내를 질주했다. 우리를 위해 비켜준 차량을 향해 가볍게 목례만 할 뿐 그 이상의 표현도 생각도 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쓸쓸히 그분이 얼마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란 생각만 들었다. 차 안에서도 어떻게 구조작업을 해야겠다는 상의도 한마디 없이 모두 앞만 보고 있었다. 현장을 눈으로 보지 않는 한 믿기 힘들었고 믿기도 싫은 사건이었다. 세상에 조롱거리가 되기 전에 빨리 현장에 도착해야 했다. 한시가 바빴다. 구조차는 한적한 시골 도로로 접어들면서 저 멀리 고가다리가 보였다. 그리고 그 다리와 땅 사이에 한 노인이 끈에 목이 걸려 매달려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노인의 자살

80 중반의 노인이었다. 그 노인은 다리 중앙까지 전동휠체어를 이용해 왔다. 전동휠체어는 비닐포장이 아직 벗겨지지 않았고 바퀴도 오래돼 보이지 않았다. 노인의 복부에 투석을 위한 튜브가 있는 것을 보니 건강하게 돌아다니기보단 오랜 시간 누워 지내신 분 같았다. 휠체어 의자 주머니에선 막대 설탕들이 들어있는 비닐봉지를 발견했다. 아마 당뇨도 있으셨던 것 같다. 노인이 사탕을 입안에 굴리는 것보단 막대 설탕 한포를 입에 털어 넣는 게 더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바리케이드에 묶인 빨랫줄이 잘 풀리지 않게 단단하게 매듭이 짓어져 있는 걸 보니 그 의지도 강했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죽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뛰어내렸음이 현장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무엇이 이 노인을 스스로 죽음에 이르게 했을까.




나는 어린 시절 할머니의 손을 많이 탔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누나는 몰라도 나 만큼은 할머니께서 땅에 내려놓지 않고 늘 업고 다녔다고 했다. 나에게도 의식이라는 게 생겼을 무렵 할머니는 치매라는 병에 걸려 시도 때도 없이 웃으셨다.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밥을 드시다가 큰 웃음에 밥풀이 온 상을 뒤덮으면 아버지께서 매우 속상해하셨다. 어머니의 병세를 걱정하며 속상해하는 아들의 모습을 할머니도 알았는지 정신이 들 때면 매번 “내가 빨리 죽어야 너희들이 편하게 살지”라는 말을 하셨다. 점점 밖에 나가는 일이 줄어들고 우리들에게 다가와 말을 거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저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할머니께서 방문을 여시며 “아가 왔냐?”하며 누나와 나의 귀가를 반겼다. 그리고 할머니는 할머니의 주문처럼 우리의 성장을 보지 못하고 일찍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본인이 빨리 죽어야 우리가 편하게 산다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꼭 그렇진 않았다.

할머니는 스스로 자살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오랜 시간 내게 많은 질문을 남겼다.
어린 마음에 난 ‘할머니가 우리와 사는 게 행복하지 않나’ ‘왜 자꾸 돌아가시려 하지’라는 생각을 했다. 나중에 커서 할머니한테 효도도 하고 맛있는 것도 사드려야겠다 했는데, 그런 말을 하는 할머니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할머니가 밥상에서 밥풀이 튀도록 웃어도 아무렇지 않았고 할머니 냄새를 싫어한 적도 없었는데 할머니는 본인이 스스로를 견디기 힘들어하셨던 것 같았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더 나아지리란 희망이 없어서였을는지 모른다.

게다가 할머니는 친구가 없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서 가장 슬픈 것은 몸은 늙는데 마음이 늙지 않는 거라고 한다. 그래서 세상은 여러 나이대의 몸을 입고 살아가는 아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고도 한다. 우리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한 몸을 입고 점점 고립되어 갔다. 아마 언제부터는 세상에 자신만 살아있음이 싫었을 수도 있다. 아끼던 친구가 세상을 하나둘씩 떠날 때 몸이 불편한 아이는 그 상처들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했을테니 말이다.

사춘기가 다시 시작이라도 된 듯 하루하루 변화하는 신체에 적응하느라 또 가족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고민이 많았을 텐데. 가진 게 치마 속 주머니에 꼬깃하게 접힌 지폐 몇 장이 전부였기에 스스로 측은했던 그 마음을 알아주었다면 좋았을텐데,, 그때 나는 너무 어렸다. 미안해요 할머니. 봄날에 꽃이 좋아 창밖으로 꽃잎을 마중하던 노인이 된 아이는 사실 죽고 싶지 않았으리라.



다리 위에서 보니 땅에 내려진 노인을 향해 후발로 도착한 소방관들이 냇가를 첨벙첨벙 건너오는 게 보였다. 구급대원들은 노인의 가슴에 ADE(자동제세동기) 패드를 붙이고 열심히 가슴압박을 했다. 다리 위쪽엔 카메라를 든 기자가 이 사건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열심히 사진을 찍어댔다. 우린 이 노인의 끔찍했던 마지막 모습이 세상에 남겨지지 않게 되었음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동안 멍하니 다리를 떠나지 못하고 현장에 남아있었다. 팀장님은 마음이 복잡해서인지 ‘복귀하자’는 단순한 말도 생각해내지 못했다.

“여러분 인생은 길고 희망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끈기를 가지고 살다 보면 분명 좋은 날 오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아무개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소방관이 되기 전에 대학교나 공공기관에 연사로 초대되어 ‘도전’과 ‘열정’을 전하는 강연자였다. 나의 경험을 반추하여 참석자들에게 필요한 이야기을 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대부분 20대 젊은 청년들이었기에 매번 레퍼토리는 비슷했다. 그리고 마지막엔 항상 저 말로 강연을 갈무리했었다. 진심으로 저렇게 믿었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다리 위 노인이 마지막으로 머문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노인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이보게 젊은이 인생은 짧고 세상은 절망적이라네.. 끈기 있게 살아보시게”라고.

오랫동안 그 광경을 잊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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