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do not realize what we have on earth untill we leave it
지구를 떠나 보지 않으면, 우리가 지구에서 가지고 있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 -제임스 라벨-
아폴로 13호 선장이었던 제임스 라벨이 지구로 돌아온 후 얘기했던 첫 소감이다. 정말로 그런가? 내 생각엔 정말로 그렇다. 나는 '떠나보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학교든, 사는 곳이든, 친구 무리든 간에. 적어도 나의 오랜 유랑 생활은 내가 그렇게 믿도록 만들었다.
유랑으로 깨달은 비밀을 당신에게만 알려주자면, 떠난다는 것은 겉보기에 여행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존재의 소실에 더 가까운 일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나의 흔적을 정리하는 것과 동시에 익숙했던 것들과 작별하고 새로운 곳으로 뛰어드는 일이다. 떠남은 키우던 고양이와 헤어지는 것, 언제든지 부를 수 있는 친구와의 치맥과 헤어지는 것, 집에 좀 더 빨리 갈 수 있는 지름길과 헤어지는 것, 내 마음에 쏙 들게 앞머리를 자르는 미용실과 헤어지는 것을 얘기한다. 하나하나 질을 냈던 내 모든 일상과 헤어지는 걸 의미한다. 생각보다 외로운 일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떠난다고 말한다면, 그 이유는 아마 '지금이 그저 그렇기'때문일거다. 나쁘지 않지만 딱 그 정도라서. 다행히 그리고 불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그래서 떠나는 걸 거다. 외로움과 존재의 소실에도 몇몇 조물주들은 과감히 새로운 터전을 찾아 지구를 떠난다.
성인이 된 인간은 반드시 지구를 나갔다 와야 한다- 앙코르와트와 같은 나라에서 그것은 보편적인 상식이었다고 합니다. 나이의 기준이란 별 의미가 없겠지만 스무 살은 확실히, 세계에 대해 냉담해질 나이니까요. 군대라도 다녀오듯 지구를 떠나, 지구를 보고, 느끼고 돌아오는 앙코르와트의 젊은이들을 나는 떠올렸다. 생각만 해도 근사한 광경이었다. 그런 나라가 왜 멸망한 걸까. 그런 나라가 왜 멸망한 겁니까? 듀란이 물었다. 멸망이라뇨? 단지 그들은 지구를 떠났을 뿐입니다. 아담이 대답했다. - 박민규, 카스테라 -
근사한 조물주는 아니지만, 지난날을 살펴보면 나는 꽤 긴 유랑을 했다. 10년 전 서면과 해운대가 지겨웠던 부산 소녀는 공장이 득실거리는 울산으로 대학을 갔다. 그곳에는 친구도 없고 잠자는 방도 비어 있었다. 그 후 소녀는 존재를 채우기 위해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꿈을 찾고 포기하고, 못하는 일에도 호기롭게 덤볐다. 그것은 잃을 것도 없고, 비어있기에 쉽게 채움이 가능했던 일이었다. 문득 빌 공(空)이라는 한자가 떠오른다. 비어있지만 동시에 공기로 가득 차있다고 했던가? 지구를 떠나 모든 것이 비어있게 되자 소녀는 비로소 스스로를 2.0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유의미한 유랑이었다.
유랑은 졸업 후에도 계속되었다. 서울에서 인턴을 하고, 영어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제주도 1달 살이 하듯 살았던 남양주에서의 1달이다. 냉장고가 비면 장을 보고 저녁에는 풀벌레 소리를 들으면서 조깅을 했다. 여기서 두 번째 비밀을 풀자면 모든 소녀가 명랑하지 않듯, 모든 유랑이 새롭고 역동적일 순 없다는 것이다. 남양주에서는 그저 우주를 떠다니며 별을 모았다. 커피를 사고 별 하나를 받는 일이다. 처음으로 돈을 벌며 어떻게든 골드 등급까지 가보겠다고 열심히 커피를 마셨다. 어떻게 보면 그저 그랬던 지구를 떠나 그저 그런 우주를 여행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매 순간마다 짜릿한 모험이 가득하다면 아마 누구든 신경쇠약이 걸리지 않았을까. 이런 유랑도 있는 거다, 남양주에서의 유랑은 그저 별을 모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모두 예상하듯 회사원이 된 나는 판교라는 행성에서 3번째 유랑을 하고 있다. 다행인 점은 기간의 차이만 있을 뿐 회사라는 곳은 여기 있는 모두가 유랑민이라는 것이다. 모두 이 회사를 Re제로부터 시작했다. 처음엔 나만 풋내기인 것 같아 긴장하고 힘이 들어갔지만, 모두가 녹록치않는 생활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비록 또다시 제로부터 시작하지만, 서로 맞는 유랑민을 만나 의지하고 연대한다면 꽤 든든한 여행을 즐길 수 있다고 믿는 중이다. 어쨌든 확실한 건 회사든 어디든 새로운 경험이 나를 더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지구를 떠나 조물주가 되어 보면 우리는 떠나기 전보다 더 성장할 수 있다. 그러니 심시티를 한다는 마음으로 애정을 담아 회사 생활을 해봐도 되겠다.
유랑이란 결국 강을 따라 흐르는 것을 의미하기에, 강줄기를 따라 유랑도 이내 끝을 맺는다. 그리고 가장 안정적이라 생각하는 그곳에서, 다시 조물주가 되어 모든 장면에 질을 내기 시작할 것이다. 낯선 것을 익숙한 것으로 손이 더 잘 가는 곳으로. 좋아하는 색으로. 그리고 나면 그곳은 새로운 지구가 될 것이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모두가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만 유랑 후 언젠가 지구에 돌아왔을 때 우리는 스스로를 더 잘 알게 되지 않을까?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무엇인지, 목표로 하는 삶의 의미에 대해 전보다 또렷하게 이해할 수 있다. 제임스 라벨의 말처럼 지구를 떠나 세계의 정체를 알고 나면 지구의 본질을 더 잘 알게 되는 것이다.
TMI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 판교를 유랑 중이고 아직 삶의 의미를 완벽하게 찾지 못했다.하지만 뭐, 그런 사람이 나뿐이랴. 지금의 행성이 익숙해지면 나는 또 유랑을 떠날 것이다. 왜냐면 지금 지구는 그저 그런 곳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