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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옫아 Apr 26. 2023

내가 심리테스를 좋아'했던' 이유

내가 누구인지가 중요했던 그 때, 나에 대한 힌트를 전해준 심리테스트들

어릴 적 나는 심리테스트를 좋아했다.

한창 자아 찾기에 몰입하던 시기라, 심리테스트를 통해 내 모습을 찾아가는 게 즐거웠다. 그리고 자아 성찰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꽤 유의미한 취미생활이라 믿었다. 그렇지만 내가 좋아한 심리테스트들은 전문적인 영역이 아니었다. 좋아하는 색을 보라색으로 고르면, ‘당신은 굉장히 비밀스러운 사람이군요’와 같은 답변이 나왔다. 그러면 나는 조용히 감탄하며, “어떻게 알았지? 정말 심리테스트는 신기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의 풀이였는데 당시에는 정말 정확한 분석이라 믿어 의심치 않곤 했다.


그 중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는 심리테스트가 하나 있다. 초등학생 때였나, 일반 포털 사이트에서 참여했는데, 나열된 다섯 점의 유명한 명화들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을 하나 고르는 심리테스트였다. 당시 나는 아름다운 풍경이 그려진 그림을 골랐다. 고를 당시에는 별다른 이유 없이 가장 예쁘고 편안한 느낌을 받았던 게 전부였다. 그림 선택 이후 팝업창에서는 “당신은 사람들로부터 매우 지친 상황입니다. 사람들 없는 편안한 자연에서 휴식을 취하고 싶군요.”라는 멘트가 떴다.(늘 그렇듯이) 나는 정확한 심리테스트의 풀이에서 속으로 “맞아, 맞아”등 동의의 감탄사를 연발하며 심리테스트의 놀라운 분석력을 또 한 번 인정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단지 사람이 하나도 없는 풍경화를 골랐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심리를 예측하는 것은 확대 해석 또는 이분법적인 사고일 수 있다. 마치 일정 가사가 없이 연주로만 구성된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은 곧 사람들의 소음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그만큼 내가 당시 빠져 있던 심리테스트들은 예리하고 정확하기보다 두루뭉실하게 혹은 특정면만 부각하여 설명하는 류의 테스트였다. 그럼에도 내가 그러한 계열의 심리테스트의 풀이에 어떠한 반박 없이 그대로 수긍한 이유는 내가 갖고 있는 여러 감정들 중 하나를 톡 건드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품고 있던 여러 생각들 중 하나를 캐치했다는 이유만으로 당시의 나는 심리테스트가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고 내가 몰랐던 내 모습을 짚어준다 믿었다.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어떠한 특정 색으로만 구성된 존재가 아니다. 굉장히 다채로운 색들의 조합으로 이뤄져 있다. 대략적으로 특정 부류로 묶을 순 있겠지만, 그것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다. 그럼에도 심리테스트의 놀랍지도 않은 결과에 그렇게 내가 깜짝 놀라며 반응했던 이유는 그 여러가지 면들 중 하나를 호명해 주었기 때문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것이 주된 과업이었던 시기에 기꺼이 내가 어떤 면들을 갖고 있는지 즉각적으로 응답했기 때문에. 물론 어떠한 측면을 나의 전부로 받아들여, 일정 틀에 나를 가뒀던 때도 분명 존재했지만 그럼에도 심리테스트를 통해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몇 가지 힌트들을 찾으며 지금의 나로 도달했다.


나는 나로 그대로 자랐다. 그래서 여전히 나는 심리테스트의 일종이라 볼 수 있는 성격 유형 검사인 MBTI 검사를 과학적이라 칭송하고, 내가 어떤 성향인지 찾아보고 “이야, 역시”의 크게 변하지 않은 감탄사로 검사 결과지를 환영한다. 4가지 기준에 따른 각 2가지 유형, 그리하여 총 16가지 유형 중 내가 어느 유형인지, 그리고 4가지 기준에 맞춘 나는 어느 편에 속하는지를 여전히 탐구한다. 다만 이제 나는 내가 어느 편에 속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님을 배워간다. 그 대신, 내가 어느 편에 가까운지를 알고, 나와 다소 거리가 있는 면 속에서의 나의 또다른 모습을 찾는 재미를 기쁘게 받아들인다. 그러니까, 나는 다양한 내 모습들 가운데 특정 영역의 내 모습만을 나로 생각하는 대신 어느 행동양식이 더 두드러지는지, 또 그러한 행동양식이 아닌 모습들에서는 어떤 내가 움직이고 있는지를 유념하려고 한다. 그렇게 나에 대한 단서들을 모으다 보면, 지금의 내 모습을 마주할 수 있다.


예전에는 테스트가 나를 호명했다면, 이제는 내가 나를 호명할 기회를 준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이름 짓지 않음으로서 존재하는 나를 인정하고자 한다. 나라는 사람을 부를 만한 명칭을 기껏 찾고 세웠을 때 그것을 부정하고 부수고 해체하는 과정이 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일정 색으로 고정된 물감 같은 내가 아닌, 다채로운 스펙트럼의 나를 찾아서 오늘도 기웃거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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