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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옫아 Apr 26. 2023

나를 슬프게 해줘서 좋았다고

그때 한 번 내 호흡으로 말해볼게,

2018.04.26.에 작성한 글. 일부 수정.


기억나?
2013년 4월쯤이었던 것 같은데.

10대 때 무수히 치룬 중간고사를, 나이의 앞자리 숫자가 바뀌었어도 여전히 또 치뤄야한다는 그 부담감과 함께 시험이 끝난 날,
그래서 우리 넷이서 함께 금요일 밤을 하얗게 불태웠던 그 날.
술을 마시고 또 마시고 심지어 새벽에도 문을 연 국밥집에서 해장까지 하고 기숙사로 향했던 그 날 밤.
밤에 보는 학교 호수가 제맛이라며 벤치에 앉아서 도란도란 떠들다가,

갑자기 네가 내게 말했지, 나의 슬픔이 아름다운거라고.
있지, 난 말야, 그때 '이게 무슨 개소리야-'라고 생각했어, 실은.

나를 콕콕 찌르며 괴롭히는 나의 아픔, 슬픔들이 대체! 어떻게! 왜! 아름다울 수 있는 거냐며 네게 쏘아붙이고 싶었어.
네가 겪어보지 않았던 나의 시간들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너의 철없음을 우습게 생각하며, 난 또 한번 자기연민의 시간을 가졌어.
네가 그토록 내게 버리라고 주문하듯이 말했던 자기연민-
그 네 글자는 내가 많이도 사랑한 나의 시간이지만,
뭐 이젠 자랑스럽게도 나 더 이상 나를 그렇게 가여워하지 않게 되었어.

그때 네 말이 담고 있던 진실이 궁금했던 건 사실이야.
뭐가 궁금했냐면- 왜 내 슬픔이 네 시각에선 아름답게 보이는지 너무도 알고싶었어.
그래서 난 그 4월의 밤 이후로 너를 졸졸 따라다니며 내 슬픔을 네 앞에서 끝없이 늘어놓았어, 이래도 아름답냐고 따지고 싶었던 거야.
다다다 몰아붙이는 내 소란스런 고백들 속에서도 너는 그래서 아름다운 거야, 라면서 또 그렇게 알 수 없는 해답을 내놓았어.
그 뒤로 내 대학생활의 화두는 "나의 슬픔이 내게 무슨 일을 일어나게끔 만들었는가"였지.

글쎄, 사실 답은 이제야 비로소 알아가는 것 같지만-
무튼 그때 말야, 나는 알 수 없는 네 해답을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지난 날들이 있다는 걸, 넌 모르지.
 
내 슬픈 조각들이라는 글을 한 번 써본 적이 있어.
나를 숨막히게 했던 나의 상처들이 새로운 국면으로 이끄는 어떤 이정표였음은 인정해.
그리고 나는 내가 선택한 상처와 살아간다는 그 말도 이제서야 인정해.

모든 질문과 답이 시작되었던 2013년 4월로부터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
여전히 4월이야- 변한 듯 변하지 않은 듯한 그 어딘가에서 숨쉬고 있어.

그러다 나는 굉장한 예언보다 더 나를 지배할 것 같은 문장을 만났어
친한 친구가 깜짝 선물로 준 시집에서 읽은 건데, 오병량의 '편지의 공원'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와.



나를 슬프게 해줘서 좋았다고



말이 되니, 슬픔의 주체가 화자 자신일텐데 그게 어떻게 좋을 수가 있어?
시간이 다시 2013년 4월의 호수로 돌아간 듯했지만, 나는 그때의 나와 달라.
슬픔이 지나간 그 자리에 깊어지는 이해의 폭이 있음을, 그 이해의 폭으로 또 다른 길을 걸어갈 수 있음을, 이제서야 조금은 알 것 같아.

시집을 읽으면서 좋은 문장들을 찾곤 했는데, 그 문장들 아래에 밑줄을 치며 외우기도 했는데.
있지, 그 문장들은 단순히 좋은 문장들이 아니었어.
내가 느끼는 어떠한 순간들과 마음을 정확히 언어로 표현한 문장들에 더 가까웠지.
그 문장들이 내게 와닿았던 이유는- 우습게도 그 문장들 안에서 내가 숨쉬고 있었기 때문이고.

슬픔이 없었다면, 난 그 언어들을 제대로 이해, 아니 번역하고 해독할 수 있었을까?

아프니까 행복하진 않아.
그렇지만 그 슬픔마저 받아들이고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나의 시간들,
그리고 그 시간들을 함께 만들어준 무언가, 또는 사람들이 있기에 행복하고 좋을 수 있는 거지.

잠 못 들었던 어느 밤들, 어느 밤들에서도 나를 괴롭힌 아픈 꿈들마저
더이상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이미 누군가가 그러한 나날들을 보내며 적은 고백 및 기록 덕분일거야.
그 언어에 기대어서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었으니까.

아직 난 내가 발견한 그 문장을 조용히 속으로 읽을 순 있지만 똑같이 발음하거나 따라적진 못하겠어.
슬프게 해줘서 좋았다고, 감히 지금은 말하지 못해.
슬픔을 안겨준 어떤 것, 어떤 사람, 어떤 이야기들이 여전히 밉고 야속해.
이렇게까지 내게 상처를 줘야만했나 따지고 싶고, 조금 더 예쁘게 봐줄 순 없었냐고 찡찡거리고도 싶어.

그렇지만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거라면, 그 이상을 바라는 게 내 욕심에 불과했던 거라면,
그러면 나는 이제 내가 느끼는 슬픔을 기꺼이 받아들여볼게.

이해할 수 없었던 시간들을 제대로 짚어볼 문장을 만나거나, 혹은 스스로 적어내거나 하는 그런 날-

그때 한 번 내 호흡으로 말해볼게,


나를 슬프게 해줘서 좋았다고







그리고 여전히, 나는 슬픔에 대해 찾는다.

최근에 쓴 글이 꽤 비슷한 결이라 같이 담아본다.


내 슬픈 조각들에게, (brun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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