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옫아 May 10. 2023

두고 오지 않았어,  다만 갖고 왔을뿐.

무얼 두고 왔는지가 아닌, 무얼 갖고 여기에 서 있는지 생각해.

나는 이제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

그때 거기에 내가 무언갈 두고 온 게 아니라고.

대신 그때 거기에서 내가 무언갈 갖고 여기에 온 거라고 믿으려고 해.


서울이 아닌 대전에서의 취업을 고집하고 희망하며, 나는 4년 간 서울 생활을 마무리했어.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할 때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새로운 학문도 공부하고 여러 대외활동했던 것들 다 특별했지만,

역시 가장 좋았던 건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푹 빠지게 될 수 있었다는 그 특별한 경험이라고 생각해.


사실, 이토록 사랑하게 될 줄 몰랐는데, 그때의 나는.

뮤지컬 자체를 정말 많이 애정하고 아꼈지, 대학로 소극장부터 대형 극장을 열심히 쏘다니며 새로운 작품과 감동을 온전히 흡수하고 다녔어. 뮤지컬이 시작되기 전 살짝 묘하게 들떠있는 공기가 가득한 로비 분위기, 자리에 앉았을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전, 실시간으로 느껴지는 배우들의 뜨거운 에너지,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순간, 극적인 감정 등 무엇 하나 빠지지 않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어.

뮤지컬 서포터즈 활동도 하고, 미치도록 본 뮤지컬 작품의 홍보 대행사랑도 사적인 친분을 갖게 되고 난 내가 그때 할 수 있는 모든 부분을 다해 푹 빠졌지.

그렇게 뮤지컬은 나의 일부가 되었고, 뮤지컬이 없던 대학생활은 이제 상상조차 안 가.


사랑한 건 사랑했던 채로 두어야 할까.

모두의 의문을 한 몸에 받으며 나는 뮤지컬과 조금도 관계 없는 업계로 취업했고, 그것도 서울이 아닌 나의 홈그라운드 대전을 선택했어. 그때는 어떤 단어로 나를 설명해야 할지 몰랐는데, 어느 순간 알게 되었어, 당시 나는 ‘번아웃 상태’였음을. 제대로 붙일 수 있는 명칭이 생기고 나니 오히려 내가 조금 더 그 시기를 잘 관리하면 지금의 모습도 바뀌었을까, 여전히 선택하지 못한 그때를 그려보고, 상상해.


대전에 온 순간부터, 뮤지컬과 동떨어진 나날들을 일궈가며 뮤지컬과 조금이라도 관계 있는 것들 것 접할 때마다 난 양가적이고 복합적인 감정을 느껴왔어.

기쁘지만 슬프고, 반갑지만 어렵고…. 그래서 나는 생각했지, 내가 무얼 놓고 왔나.

도대체 무얼 두고 왔길래 이리도 자꾸 뒤돌아 보게 되고 그리워하는지, 말야.


그래서 뒤돌아 보고 싶을 때쯤, 나는 지금 여기의 나를 봐.

그때 그 순간 온 마음 받쳐 사랑한 무언가로 인해,

지금의 나는 더 나다울 수 있는 길을 걷게 되었다고 생각해.

내가 왜 사랑했지, 어떻게 사랑했지 등 사랑했던 것에 대한 다양한 의문들이 나를 이끌었지.

내가 무얼 사랑하고 무얼 아꼈는지 잊어버린 게 아냐, 그저 마음에 그대로 품고 있는 거지.

그래서 나는 내가 무얼 두고 왔는지가 아닌, 무얼 갖고 여기에 서 있는지 생각해.

그때의 내가 두고 온 건 단 하나도 없어.

모두 다 안고서, 그리고 일부는 내 어딘가에 새겨진 채로 지금의 내가 되었어.

그러면 나는 그때의 내 선택도 지금의 나도 모두 긍정할 수 있지.


그리고 ‘오히려 좋을’지도 몰라. 그때 내가 무언갈 사랑했어서.

뮤지컬을 사랑함으로써 아무것도 아닌 내가 되기보다 어떤 내가 되길 선택할 수 있었어.

그래서 나는 그때가 그리워지고 그때로 자꾸만 돌아가고 싶을 때,

그 감정은 부정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지금으로 이끈 그때의 내 선택도 존중해주려고 해.


그 무엇도 두고 오지 않았어, 다만 갖고 왔을뿐.


매거진의 이전글 나를 슬프게 해줘서 좋았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