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문고전 순례 (10) 인간 불평등 기원론
몇 년 전 일이다.
MBA를 오기 전 마지막으로 일했던 부서로 이동한지 몇 달 지나지 않아 부서 전체 워크숍을 서울 광장동 회사 연수원에서 갖게 되었다. 이 부서로 이동하기 직전에 있었던 전 부서는 CEO를 지원하는 경영기획 부서라 회사를 비우기 어려웠는데 개인적으로도 몇 년만에 회사를 떠나 다른 공간에서 업무 밖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게되는 것이 기대되었다. 그 부서는 새로 조직된지 2년밖에 되지 않는 아주 어린 부서였다. 구성원 나이도 젊은 편이었고 중후한 에너지 회사의 대부분 조직이 남자 구성원이 많은 편인데 비해 그 부서는 남자와 여자가 동수를 이루고 있어 구성원 성 비율도 다른 부서에 비해 남다른 셈이었다. 마침 부서 신설 이후 2년 만에 부서 역할을 확대하여 개편하고 명칭도 바꾸고 인력도 대거 확충하고 CEO 직속조직으로 진행 경과를 계속 보고해야 해서 여러모로 구성원들의 사기가 높았다. 나를 포함해 새로 전입한 구성원이 많았기 때문에 워크숍에서는 서로 돌아가며 자기 소개를 했다. 이어 부서장이 평소 본인이 생각하는 철학을 담아 바람직한 조직 문화에 대해 1시간 정도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냥 빨리 끝내주세요 그게 좋은 조직문화에요 …… 라는 마음을 처음에는 조금 가졌던것이 사실이지만 이야기를 듣다보니 생각보다 뻔하지 않은 내용이라 흥미롭게 듣게 되었다.
부서장은 화면에 가로축과 세로축으로 구분된 사분면을 보여주었다. 한 축은 얼마나 직접적으로 타인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지(Challenge directly)에 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얼마나 개인적으로 사려깊게 배려하는지 (Care personally) 에 대한 것이었다. 이 두 축이 강하게 발현되고 약하게 발현되는지에 따라 네 가지 다른 유형의 소통 방식이 존재하는데 1) 지독한 솔직함, 2) 불쾌한 공격, 3) 파괴적 공감, 4) 고의적 거짓이 그것이었다. 이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것은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지독한 솔직함 (Radical Candor)’ 인데 부서장은 우리 부서의 모든 구성원이 서로에게 지독할 정도로 솔직하게 소통하고 서로 피드백을 주고 받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Radical Candor 라는 개념에 대해 알게된 것도 흥미로웠지만 그날의 강의가 기억에 남은 것은 강의가 끝날 무렵 부서장이 남긴 한마디 때문이었다. 부서장은 우리에게 “남의 욕망에 따라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말고 자신이 욕망하는 그 방향대로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 그 솔직함에 따라 서로 경쟁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라고 이야기했다. 본인이 직장 생활을 하며 봤던 많은 구성원들은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지 않고 상사가, 동료가 하자는대로 따라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것이 몹시 아쉬웠다고 했다. 나의 욕망. 내 머리 속을 울린 단어는 그 욕망이라는 두 글자였다.
그 당시 나는 정신 분석학에 대한 관심의 일환으로 프로이트와 융에 이어 자크 라캉의 이론을 다룬 개론서를 몇 권 읽던 중이었는데 그의 여러 이론 중에 내가 가장 좋아했던 표현은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Le désir de l'homme est le désir de l'Autre)> 이었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을 인식하며 나에 대해 깊이 사유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군상 속 한 개인으로 타인과 교류하고 섞이며 그들이 나에게 욕망하는 것을 내가 나의 욕망인 것으로 착각하며 그것을 나도 염원하고 쫓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없다. 그 욕망은 타인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타인의 시선에 비추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우리 자신의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고 나에 대해 나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점은 오만이라는 라캉의 메시지는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라캉의 욕망 이론의 개념과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직장생활을 점점 하면서 나 자신과 나의 성장만을 생각하던 사회적 유년기를 벗어나게 되고 5년차, 10년차가 지나며 약간의 성공과 운이 쌓이면서 점차 회사 속 타인이 보는 나에 대해, 그들이 나에 대해 기대하는 것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에 라캉의 메시지에 더 크기 반응했던 것 같다. 그랬기 때문에 회사 워크숍에서 라캉의 욕망 개념을 다른 이의 입을 빌어 다시 듣게 되는 경험은 무척 신기했고 덕분에 부서장의 강연을 쉽게 잊을 수 없기 만들었다. 부서장이 라캉의 철학을 알고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한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숫자와 전략으로 가득한 회사의 언어 속에서 철학의 언어를 발견한 것은 그 자체만으로 아주 신나는 일이었다.
라캉이 환기되는 경험은 장 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읽으며 다시 한 번 재현되었다.
이 책을 읽기 바로 전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읽을 때 내가 가장 인상적이라고 여긴 부분은 그가 군주정을 옹호했다는 점이 아니었다. 비록 우리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멈추고 자기 보존을 위해 자발적으로 나의 권리를 주권자 한 명에게 양도했지만 주권자가 개인의 자기 보존 권리 실현에 미흡하다면 주권자에게 양도한 권리를 회수할 수 있다는 점은 왕정 시대 속에서 그가 살았던 점을 떠올리면 정말 혁신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너를 믿고 네가 나를 지배하고 통치할 권리를 인정하겠지만 너의 역할을 네가 충실히 수행하지 못하면 나는 너를 주권자로 인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이었다. 어디까지나 중요한 것은 자기 보존이 가능한 최적의 조건이 무엇이냐에 대한 판단인 것이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도 어쩌면 루소의 주장이 담긴 핵심 대목이 아닐 수 있지만 내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부분 역시 루소가 타자의 욕망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었다. 루소는 이렇게 말한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자기 자신의 판단보다는 타인의 판단에 행복해하고 만족스러워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이 모든 (불평등의) 차이의 진짜 원인이다. 즉 미개인은 자기 자신 속에서 살고 있는 반면 항상 자기 밖에서 살고 있는 사회인은 오직 다른 사람들의 의건 속에서만 살아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오직 타인의 판단으로부터만 자기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끌어내는 것이다……” 루소는 그의 대표작인 <사회계약론>을 저술하기에 앞서 왜 인간은 현재와 같이 불평등한 상태로 전락하였는지 그 기원에 대해 고찰하는 논문을 작성하여 아카데미에 투고한다. 루소에 의하면 이 지구 상에는 가장 태초에 자연 속에서 큰 욕심없이 살아가는 미개인이 존재했다. 미개인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고 선과 악에 대해 아무런 가치 판단 개념을 가지지 않았고 무리짓지 않고 개별적으로 생명을 연장하며 살아갔다.
미개인에게 가장 결여된 것은 욕망이었다. 무엇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 무엇이 되고 싶다는 욕망, 무엇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이들에게는 없었다. 미개인을 둘러싼 자연은 너무나 균질하고 조화롭고 대칭적으로 이루어져 큰 변곡없이 매일이 흘러갔다. 해와 달은 늘 같은 위치에서 같은 시간에 떠오르고 졌고 밤하늘에서 관측되는 별자리도 늘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들에게도 물을 마시고 식량을 확보해 먹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욕구는 있었으나 그 욕구가 채워지고 나면 그 이상의 욕망으로 확장되지는 않았다. 미개인은 하루하루 욕구의 결핍과 충족이라는 아주 작은 단위의 요동은 있었지만 긴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큰 수준의 욕망의 연쇄 반응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채워지지 않은 욕구, 기본적인 욕구의 여집합에서 욕망을 경험한 최초의 인간이 어느 순간 나타났다. 그에게 욕망을 가능하게 한것은 잉여의 사유와 그것으로부터 생성된 관념이었다.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이 되고 싶고 무엇을 갖고 싶다는 관념이 그로 하여금 기본적인 욕구 이외의 욕망을 만들었다.
최초의 욕망은 많은 것을 계속해서 만들어낸다. 소유라는 개념을 만들고 나의 소유와 너의 소유의 대립 속에서 제도와 정의라는 개념이 생겨난다. 나와 너의 소유는 공동의 소유로 이어지고 개별적으로 살아가던 미개인은 점차 군집을 이루고 사회를 형성하고 종국에는 국가를 결성한다. 이렇게 개인이 사회를 이루어 자신과 타자와 함께 살게되자 욕망은 더 바쁘게 그 굴레를 돌리기 시작한다. 나의 욕망은 더 커지고 라캉과 루소가 지적한 것처럼 나는 나의 욕망 뿐만 아니라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더 많은 것을 스스로에게 요구하기 시작한다. 그 욕망의 늪에 빠지면서 인간은 점차 불행해지고 불평등하게 되었다는 것이 루소의 주장이다. 그 불평등의 끝은 정치적으로 전제군주정 또는 독재자에게 지배받는 것이니, 욕구에서 욕망으로 변이된 최초의 인간 이후로 인류는 끝없는 불평등을 향해 퇴보의 역사를 기록한 셈이다. 그러므로 루소는 우리에게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관념도 욕망도 개념도 소유도 정의도 선과 악도 존재하지 않았던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이야기하게 된다. 오늘 날 불평등의 씨앗이 바로 그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 욕망은 내면에 깃든 나만의 욕망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서 발견하는 타인의 욕망이라는문장을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 역시 아주 신나는 일이었다. 라캉보다 200년 먼저 살았던 루소가 라캉과 동일한 지점에서 인간의 불평등과 불행의 기원을 언급했다는 점은 무척 현대적인 진단이었다.
나는 루소가 말한 최초의 욕망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았다.
루소 역시 어떻게 기본적인 욕구 충족에만 충실했던 미개인에게 욕망이라는 경험이 발생하게 되었는지 그 원인은 분명히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욕구에서 욕망은 획기적인 변화였다. 그건 마치 우주가 빅뱅을 통해 시작된 이후 급격한 팽창(Inflation)을 겪으며 기하급수적으로 확장하게 되었다는 현대 우주론을 떠올리게 했다. 때마침 나는 ‘신의 입자’라고 불리는 힉스 보손 발견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이탈리아의 입자 물리학자 귀도 토넬리가 우주, 지구, 생명의 기원에 대해 쓴 책 <제네시스>를 얼마 전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귀도 토넬리는 이 책을 통해 빅뱅 이후 현재까지 138억년에 걸쳐 우주의 존재가 어떻게 생성되었는지를 일곱 단계에 걸쳐 묘사하는데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빅뱅 이후에 10의 -36초에서 10의 -32초 사이에 발생하는 급격한 팽창에 대한 부분이다. 급격한 팽창을 이런 식으로 간단히 이해해보자. 우주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진공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우주 대기에 산소가 없다거나 때문에 소리가 전달되지 않는다거나 혹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존재, 비존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미시적인 단계에서 보면 우주는 끊임없이 존재와 반존재가 서로 균형을 이루며 서로의 힘을 상괘시키고 있고 거시적인 단계에서 보면 중력으로 대표되는 수축 에너지와 빅뱅 이후의 팽창 에너지가 서로 에너지의 크기 측면에서 상쇄되며 전체의 합계는 0이 되는데 이것이 우주의 진공 상태의 본질이다. 즉 진공은 텅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양의 에너지와 음의 에너지의 대립과 조화로 가득하며 그 사이의 균형점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는 빅뱅 직후 탄생한 초기 우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탈로 칼비노가 <모든 것은 한 점에>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초기 우주는 양자 레벨에서의 한 특이점에 모여있었는데 그 속에서도 양자 요동은 부글부글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양자 단계의 작은 존재들이 등장하며 특정 방향의 에너지를 우주에 부여했다가 이내 수축하면서 다시 반대 방향의 에너지가 우주에 추가되며 전체 우주는 균형을 이루는 진공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마치 욕구에서 욕망을 발견해버린 최초의 미개인처럼, 빅뱅 이후 어느 순간에 한쪽으로만 팽창의 에너지가 증가해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아주 짧은 순간 우주를 진짜 진공이 아니라 가짜 진공에 놓이게 하는 이 획기적인 사건으로, 늘 균형점에 다시 돌아오던 양자요동은 균형점에서 벗어나 기하급수적인 공간의 팽창을 시작하게 된다. 급격한 팽창 이론을 제시한 앨런 구스 교수는 수축하는 중력에 대항하는 이 반중력의 순간적인 발생과 가속이 오늘의 우주를 만든 원인이라고 한다. 귀도 토넬리는 그 순간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구스가 가정한 원시장은 강력한 역동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화에서 왕자의 입맞춤이 아름다운 여인의 잠을 방해하지만 아주 잠깐 동안만 그럴 뿐 놀라운 마법을 일으키는 것처럼 말이죠. 아주 짧은 순간 동안 장을 가짜 진공에 가두는 이 은밀한 각성은, 시간에 따라 크게 변하는 반발력을 생성합니다. 장이 갇혀 있는 동안에는 그 힘이 엄청나지만, 가짜 진공 상태에서 벗어나는 즉시 급격히 떨어집니다. 우주의 기원에서 맹렬한 팽창을 일으키는 앨런 구스의 반중력은 우주 상수보다 100배나 더 큽니다. 모든 것을 엄청난 속도로 팽창시킨 것은 바로 이 놀라운 음의 압력입니다. 여기서 시작된 것입니다. (생략)
우주가 항상 균일한 진공을 유지하다가 그것이 갑자기 깨져버리며 급격한 팽창을 이루어 낸 그 순간과, 기본적인 욕구에 만족하던 미개인이 관념의 생성 속에서 최초의 욕망을 발견한 장면은 놀랍도록 비슷하고 경이로운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한쪽은 138억년에 달하는 우주의 시작에 대해 다루고 있고 다른 한쪽은 공동체를 이루며 불행과 불평등의 역사를 써내려간 사회인의 기원에 대해 다루고 있다. 우주와 인간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그 지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데 우주와 인간이 유사한 원리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점은, 루소가 정신분석학에 이어 천문학과 물리학의 영역에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200년 앞서 제시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까 아니면 그것이 자연과학이든 정치철학이든 이론가와 사상가 사이에는 서로 교집합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까……
나는 라캉과 루소와 현대 물리 우주론을 교차하며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읽어갔다. 루소가 <사회계약론>을 통해 현대 개인주의와 민주주의의 씨앗을 널리 알렸다는 업적보다도, 그가 인간의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또 그 기원이 가능했던 특이점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는지를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통해 엿보는 것이 더 흥미로웠다. 우주가 양자 요동에서 벗어나 급격한 팽창이 가능하게 된 그 특이점의 원인을 명쾌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것처럼 미개인이 어떻게 욕망을 떠올리게 되었는지 그 최초의 원인을 밝힐 수 없다는 점 역시 이 서사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이유 중 하나다.
이런 생각을 해봤다.
루소가 제시한 인간의 서사와 앨런 구스가 말한 우주의 서사는 최초의 예상하지 못한 특이점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결정적으로 큰 차이가 하나 있다. 우주에는 정해진 서사의 방향이라는 것이 없다. 우주는 강력, 약력, 전자기력, 중력 네 가지 힘이 작용하며 양성자, 중성자 등을 만들어내며 여기에서 물질이 생겨나고 물질에서 생명이 탄생하여 오늘 날에 이르고 있다. 이 이야기에 정해진 각본은 없고 우리는 무수한 우연과 변이의 조합의 결과물이다. 지금이 아닌 다른 서사도 가능했을 것이고 혹은 지금과 다른 서사가 우리의 서사와 함께 어디선가 공존하며 진행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멀티 유니버스를 다룬 영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처럼 말이다. 그러나 루소가 상상한 인간의 서사는 한 방향으로 흐른다.
미개인이 존재했던 자연은 그가 생각하는 자유와 평등의 원형이며 사회인이 공동체를 이루며 폭군의 지배로 귀결되는 이야기는 불행과 불평등이라는 일방향으로 전개된다. 그 불평등을 막아보기 위해 만인이 서로 계약을 맺으며 국가를 형성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소설의 끝은 새드 엔딩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에서 민주주의와 서구의 승리로 결말짓는 해피엔딩을 이야기했다면 루소는 그 반대를 이야기한 셈이다.
아무래도 좋다. 핵심은, 루소는 우주의 서사와는 달리 인간의 역사에는 특정한 방향이 존재하며 존재할 수 밖에 없다고 본 점이다. 만약 이 인간 서사의 방향이라는 것을 우주의 관점에서 접근해본다면 어떨까. 그러니까 우주의 팽창에는 아무런 정해진 방향이 없고 양의 에너지와 음의 에너지가 서로 상쇄되며 균형을 이루는 0의 진공 상태이기 때문에 인간의 역사도 그와 같을 수 있다는 관점을 떠올려보는 거다.
실제로 우리의 역사도 비슷한 경로를 밟아왔다. 인간의 의도대로 모든 사건이 촉발되고 진행되고 종결되기는 커녕 우연이 역사의 분수령이 된 경우가 많았다. 시인 황동규의 고백처럼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연에 기대지 않을 때가 있었던 것처럼 인간의 역사는 정해진 목적지 없이 전개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양의 에너지와 음의 에너지가 서로 상쇄되어 진공이 되는 것처럼 인류는 과학과 문화적인 측면에서 급격한 발전을 이루었지만 기후위기와 사회적 양극화라는 퇴보도 만만치 않다. 정치적으로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최근 엔비디아 주가 폭등이 기념하듯 그 어느 때보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 보이지만 2024년 미국 대선을 앞둔 지금 민주주의 가치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과거보다 다소 후퇴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한 걸음 진보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그에 반대되는 에너지가 생성되며 우리의 총합은 이전에 비해 결코 나아지지 않는다는 생각은 자칫 우리를 허무주의에 빠지게 할 수 있다. 어차피 세상은 나의 노력과는 무관하기 정해진 방향도 없이 흘러가니 나의 노력이 무용하다는 생각, 진보는 퇴보를 어디선가 또 만들어내기에 진보를 만드려는 노력이 무용하다는 생각. 이런 생각들은 우리를 미래에 대한 낙관론도, 비관론도 아닌 그 사이 지점으로 밀어넣을 수도 있다. 우리가 만드는 서사에는 결국 방향이라는 것이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 거시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런 생각이 꼭 틀렸다고는 볼 수 없다. 우리가 진보한 것만큼 퇴보한 것도 무수히 많다.
다시 앞서의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앞서 이야기했던, 워크숍에서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강의를 들었던 나의 부서는 회사의 지속가능성 관련 업무를 다루는 ESG(환경, 사회, 거버넌스) 부서였다. 원래 이 부서는 우리 그룹 전체적으로 지향하는 경영철학인 사회적 가치 (Social Value)를 추진하는 작은 부서였는데 내가 합류할 무렵에 부서 명칭을 ESG 전략실로 개칭하고 업무 범위를 지속가능성 전략과 관련한 모든 영역으로 대폭 확대하였다.
나는 MBA를 떠나기 전까지 ESG 부서에서 3년 정도 일을 하며 회사가 지속가능한 성장을 한다는 것의 의미, 전략 방향, 구체적인 과제들에 대해 고민하고 그 방향을 제도로 설계하는 일을 맡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우리 기업의 탄소 감축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론에 대한 전략을 수립하는 일이었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에너지 산업, 그 중에서도 원유를 정제해서 휘발유나 경우와 같이 석유제품을 생산하는 석유화학산업에 속해있었고 석유화학산업은 시멘트나 철강 산업과 더불어 대표적인 탄소 배출 산업 중 하나였다. 우리 회사가 직접적으로 배출하는 탄소의 양은 일년에 1,200만 톤이 넘었다. 어마어마한 수치다. 또 내가 다니는 회사는 그 아래에 8개의 자회사를 관리하는 지주회사였기 때문에 8개 자회사가 모두 참여하는 대규모의 탄소 감축 목표를 수립하는 것은 만만한 프로젝트는 아니었다.
나를 포함해서 우리 부서 전체가 의견을 모아 2030년까지, 205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얼마나 어떤 식으로 감축해나갈 것인지 정하고 외부의 다양한 이해관계자에게 우리의 전략을 이야기하는 과정은 무척 즐겁고 재미있었다. 나는 ESG부서로 이동하기 전 10년 동안 에너지 산업과 관련한 부서만을 전전했다. 회사 경영손익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는 미래 유가(원유 가격)를 전망하는 부서, 회사 전체의 경영전략을 수립하는 부서, 국내 에너지 정책을 전반적으로 이해하고 대응해야하는 부서 …… 그런 부서들은 대부분 경제적인 성장, 즉 돈을 벌고 점유율을 늘리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그 속에서 일의 의미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ESG 부서에 오고 난 후, 재무제표로 증명되는 회사의 경제적인 성장과는 또다른 지속가능한 성장 또한 무척 의미있을 뿐 아니라 그러한 활동을 통해 회사가 돈을 벌 수도 있겠다는 점을 새롭게 경험하고 이해했다. 단순히 돈을 버는 일보다 (물론 내가 직접 사업을 해서 돈을 번 것도 아니었지만)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가치를 더하면서 돈을 버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또 타인에게도 떳떳했다.
내가 속했던 ESG부서가 지향하는 바는, 그리고 그 속에서 내가 했던 일은 비록 인간의 서사는 항상 어둠에서 빛을 향하는 진보를 의미한다고 믿는 데서 기인한 것은 아니었다. 인류의 서사에 정해진 방향이라는 것은 없고 언제나 양의 에너지와 음의 에너지가 우주처럼 진공을 이룬다 하더라도 미시적인 세계에서 발생하는 팽창과 수축의 요동 중에서 팽창에 반대되는 중력파를 만들어보자는 행위였다. 탄소를 감축하고 플라스틱 쓰레기를 재활용하는 수축의 퍼텐셜이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거 우주가 그랬듯이 급격한 팽창이 이유 없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기업이 지속가능한 방향으로 성장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었다. 팽창하는 것에는 그에 반대되는 수축이 필요하다는 생각… 지금도 진공을 이루고 있는 우주의 섭리이든, 아니면 불평등이라는 종말로의 팽창을 억제하기 위해 사회계약 이론을 떠올린 루소의 사상이든, 그 어느 쪽이든 무한대로 뻗어가는 인간의 욕망을 조금이나마 줄여보려는 노력은 그 자체로 의미 있다고 믿는다. 우주가 빅뱅 이후 또 한 번의 급격한 팽창을 겪는다면 그 원인이 인류세의 행위에 있기는 싫었던 거다.
어쩌면 반대 방향으로 특이점이 발생할 수도 있는거다. 만약 인간의 욕망을 줄여보려는 환경적인, 정치적인, 사회적인 노력이 특이점이 되어 이번에는 급격한 수축이 발생한다면 어떨까. 그래서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데 타자의 욕망이 팽창이 아니라 수축이라서 더 많는 사람들이 뻗어나가지 않고 중지하고 회귀하려고 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그런 특이점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고 ESG부서와 같은 조직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ESG부서로 이동한다고 하자 반대했던 많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루소의 책을 읽으며 나는 오히려 여전히 미시적인 수준에서는 부글부글 끓고 있는 양의 에너지와 음의 에너지, 팽창과 수축, 생성과 소멸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