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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 화엉 Sep 23. 2024

거세된 늑대

나의 인문고전 순례 (9) 리바이어던

2024년 6월 말 나는 미국 국경을 지나 캐나다의 로키 산맥으로 향하고 있었다. MBA 첫 1년 과정을 모두 마친 이후 아이의 초등학교 1학년 과정이 끝나기를 기다려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으로 향했는데 한 달 가까운 긴 여행의 중간 목적지는 캐나다 앨버타 주에 위치한 재스퍼(Jasper) 국립공원이었다. 밴프(Banff), 요호(Yoho), 재스퍼(Jasper). 낯선 국립공원 이름을 되뇌이는 가운데 눈과 빙하의 침식이 만들어 낸 자연경관을 스쳐가며 계속 북으로 향했는데, 차를 멈추고 숙소에서 쉬어갈 때마다 나는 자연경관과 크게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가지를 관심있게 읽고 지켜보았다. 하나는 영국의 정치사상가 토마스 홉스의 전기 <홉스>와 그의 대표적 저작인 <리바이어던>을 읽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즈음 한국 국회에서 진행되고 있던 국회 상임위원회 중계방송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것이었다. 미국과 캐나다 로키 산맥의 <자연>,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 그리고 한국 국회의 <상임위원회> 이 셋은 의외로 묘한 연결고리를 만들며 독특한 인상을 내게 남겨주었다.


한국의 제22대 국회는 2024년 6월 5일 개원하였다. 개원 초기에는 야당인 민주당만이 상임위원회에 의원을 배정하여 민주당 중심으로 위원회가 운영되었으나 몇 주 지나지 않아 여당인 국민의힘도 위원회에 참여하고 활동을 개시하게 되어 우리가 일반적으로 방송을 통해 접했던 그 장면대로 여당과 야당이 모두 참여하는 모습 아래 국회의 여러 상임위원회가 개최되고 현안질의와 청문회가 시행되었다. 캐나다 국립공원 근처 숙소에서 하루의 고단한 여정을 정리하고 잠들기 전에 국회 상임위원회 중계방송을 실시간으로 본 것도 그즈음이었다. 시차가 15시간 정도 나기 때문에 한국에서 오전 또는 오후에 열리는 상임위원회를 이곳에서는 저녁과 밤에 볼 수 있었던거다. 재미있는 것은 여행 초반에 보았던 상임위원회와 여행 중반의 상임위원회는 그 양상이 전혀 달랐던 점이다. 여행 초반이었던 6월 중순에는 여당이었던 국민의힘이 국회 원구성을 보이콧하며 상임위원회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야당인 민주당 단독으로 회의가 진행되었는데, 나와 생각이 다른 상대방이 없기 때문에 회의는 무척 빠르고 효율적이었고 치열한 전쟁은 국회의원과 증인으로 참석한 국가 공직자 사이에 이루어졌다. 그나마도 질문은 국회의원이 하며 대답은 공직자들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둘 사이의 대립은 일방적이었다. 모든 과정은 하나의 방향으로 빠르고 강하게 흘러갔고 멈추거나 저항하거나 제자리에서 맴도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여행이 좀 더 이루어진 6월 하순이 되자 여당인 국민의힘도 상임위원회에 합류했고 그때부터 회의는 이전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나는 주로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와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 회의를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는데 두 상임위원회 위원장은 야당에서 맡고 있었기 때문에 여당 국회의원들은 끊임없이 위원장의 회의 진행 방식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위원장이 같은 아당에게만 더 우호적으로 회의를 진행한다, 야당 의원이 의사 진행 발언권을 신청했는데 무시하고 회의를 진행한다, 이렇게 편파적으로 상임위원회를 운영하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 아까 현안질의 할 때 야당 의원이 나에게 이런 발언을 했는데 모욕적이라 사과를 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회의에 함께하지 않겠다 …… 증인과 참고인을 대상으로 하는 질의와는 무관하게 여당 의원은 끊임없이 갈등을 만들어낸다. 그러면 이에 대해 야당 의원과 위원장 역시 가만있지 않고 계속 설전을 벌인다. 국회의원이 상임위원회에 참석했으면 그에 맞게 현안에 대한 질문을 해라, 당신이나 사과를 먼저 하라, 국민이 보고 있다. 야당이든 여당이든 그들은 차분하게 회의를 시작하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모두 소리를 지르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서로에게 삿대질하고 얼굴이 붉어지고 회의장을 나가버리며 자신의 권리 이행을 요구하고 페르소나 아래의 본 얼굴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상임위원회를 보며 토마스 홉스가 이야기한 자연의 상태, 즉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약간이라도 구현된다면 이런 모습에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되었다. 홉스는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는 모두가 자신의 생존을 최우선적으로 추구하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수단을 다 활용한다고 봤다. 생존을 위한 무서운 집착과 욕망을 그는 인간의 본능적인 정념이라고 말했는데, 이 정념 때문에 자연 상태에서는 모든 인간이 서로를 공격하고 배제하고 끊임없이 투쟁하게 되며 늘 투쟁의 가능성 아래에서 인간은 두려워하고 공포로 가득한 삶을 살게 된다. 자신의 생존을 위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 국회에서 우리가 지켜보는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의가 있다고 믿으며 그 대의에 따라 서로를 공격하는 의원도 분명 있겠지만 다수는 자신의 생존에 도움이 되기 위해, 즉 국회의원으로서 계속해서 선수를 쌓기위해 대중으로부터 혹은 같은 당의 지도부로부터 눈도장을 받기 위해 그러한 투쟁을 하는 것으로 내게는 보인다. 그들은 내부 공천과 대중 투표라는 치열한 투쟁을 견디며 그 자리에 선 것이다. 힘겹게 생존한만큼 그들은 자신의 생존에 무엇보다 민감하다. 그들에게 여당과 야당의 구분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당적을 바꾸고 어제 같은 편이었던 이들에게 목소리를 높이고 손가락질을 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그야말로 만인의 투쟁이다. 생존을 위한 자연의 단면이다. 홉스가 말하는 자연과 여의도 국회는 먹을거리와 물자가 풍족한 통가의 낙원이 아니다. 자원은 유한하고 국회의원 수는 300명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은 좁은 문을 두고 살아남기 위해 계속 싸울 수 밖에 없다. 


홉스의 말대로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늑대다(Homo homini lupus).


그러나 상임위원회의 투쟁이 아무런 규칙 없이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22대 국회의 상임위원회를 보며 이전과 가장 다르다고 느꼈던 점은, 유난히 법대로 하자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위원장을 포함한 모든 국회의원들은 자신의 발언과 행위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 법 조항을 꺼내 읽는 모습을 보인다. 국회상임위원회의 구성 및 운영에 관한 규정을 담은 소책자를 꺼내 규정을 읽는 모습은 기본이고 국회법, 심지어 헌법까지 열거하며 이 법에 의해, 이 법에 따르면 이라는 말로 자신의 행위를 변호하고 상대를 공격한다. 그러니까 이들의 투쟁은 때로는 아무런 규칙없이 마구잡이로 진행되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법과 규정이 정해놓은 테두리 아래에서, 그 경계선 아래에서 진행된다. 이 법을 지키지 않으면 자신의 행동이 정당화 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의원들은 아무리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자신의 자유와 평등을 일부 희생하며 모두가 합의한 이 규칙을 준수한다. 국회의원들이 법을 꺼내 읽으며 그 법 안에서 우리 싸우자고 하는 장면은 홉스가 이야기한 시민법이 연상되었다. 


<리바이어던>을 통해 홉스는, 인간은 자기 보존을 위해 역설적으로 스스로의 권리를 내려놓고 커먼웰스(공동체)를 설립하고 커먼웰스가 제정하는 시민법을 자발적으로 따르며 이 시민법이 금지하는 것은 하지 않고 그 이외의 것은 마음대로 누리며 제한된 자유를 영위한다고 했다. 아무런 제약이 없는 자연 상태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롭지만 동시에 모두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자유롭게 타인을 수단화하고 공격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 보존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을 규제할 수 있는 시민법을 따른다는 것이다. 대단히 흥미로운 착상이었다. 법은 국민이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이 충동적인 욕구나 성급함으로 그 자신을 해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국민을 지도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울타리가 길을 걷는 사람의 길을 따라가도록 하기 위해 세워지는 이치와 같다고 홉스는 말했다. 어느 지역을 대표하는 이들이 마치 그리스 아고라에 모여 모두가 자기 할 말만을 떠들어대는 것과 달리, 더 지속적인 생존을 위해서는 다른 의원의 존재를 인정하고 공동의 가치를 추구해야 함을 이해하고, 여의도에 모여 국회라는 커먼웰스를 구성하여 이 커먼웰스를 운영하는 시민법을 만들고, 법 테두리 내에서 협력하고 투쟁하는 오늘의 모습은 홉스가 국가가 왜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나는 홉스가 말한 자연 속 만인의 만인에 대한 늑대들의 투쟁과 커먼웰스를 구성하고 법을 준수하는 인간들의 투쟁이 이 상임위원회에 적당히 섞여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는 우리가 인간임을 알려주기 보다는, 인간 이전에 늑대였음을 고백하는 일종의 폭로에 가까웠다. 상임위원회의 시작은 보통 차분하고 조용하게 시작되며 야당과 여당이 서로 웃기도 하며 덕담을 건네기도 한다. 그러나 회의가 진행될수록 점차 투쟁과 날선 공방이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우리가 자기 보존을 위해 스스로의 자유를 자발적으로 헌납했을 뿐 사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얼마든지 자신만을 위해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늑대임을 잊지 않도록 해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국회 상임위원회의 투쟁이 홉스의 <리바이어던>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홉스는 모든 인간이 자기 보존을 위해 자유와 평등의 원칙을 희생하고 자신을 통제할 권리를 강력한 주권자에게 제공한다고 봤다. 강력한 주권자란 종교적으로는 신이고, 현실 세계에서는 군주를 의미하기 때문에 홉스는 군주정이 가장 합리적이고 우수한 정치 체제라고 여겼다. 홉스가 활동했던 17세기 영국은 제임스 1세의 아들인 찰스 1세가 군주로 활동하던 시기인데 의회와 젠트리 계급과 갈등을 빚다가 결국 잉글랜드 내전을 겪으며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사형당하게 된다. 한 국가의 주권자인 군주가 국민에 의해 제거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홉스의 이론은 군주제를 옹호하기 위한 낡은 정치사상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홉스는 군주를 중심으로 하는 리바이어던(커먼웰스)이 강력한 주권을 행사할 때 국민이 자발적으로 헌납한 자유와 평등이 오히려 더 영구히 지속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리바이어던>에 등장한 홉스의 정치사상을 둘로 구분해본다면 첫째는 늑대가 되지 않기 위해 커먼웰스를 이루기로 합의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것이며, 둘째는 그 커먼웰스를 운영하는 주체가 민주정이나 귀족정이 아니라 한 명의 강력한 주권자인 군주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국회 상임위원회를 생각해보자. 어떤 상임위원회의 위원장은 상임위원회 운영규정과 국회법에 대한 높은 이해도와 스스로의 강력한 카리스마에 힘입어 높은 수준의 권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협조요청과 지시에 따르지 않는 증인은 퇴장시켰다가 다시 들어오게 하고, 어떤 의원에게 몇 분의 발언기회를 줄 것인지를 결정하고 의원, 증인, 참고인 가릴 것 없이 질타하고 윽박지르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이러한 운영 방식에 어떤 의원이 불만을 드러내면 바로 마이크를 끄는 식으로 자신의 주권을 행사한다. 이는 국회의원들 스스로 규정하고 합의한 시민법인 국회법에 명시가 되어있기 때문에 의원들은 불만스러우면서도 자유의 제한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상임위원회 위원장은 홉스가 이야기하는 커먼웰스의 수장인 주권자의 권위에는 발 끝에도 미치지 못할만큼 미약한 존재이다. 


주권자는 국민의 신체와 생명에 대해 개입할 권리를 갖고 이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공동체의 전체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 주권자는 국민과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이다. 그러나 국회 상임위원회의 위원장은, 아니 설령 국회의장이나 하다 못해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주권자로서 공동체의 구성원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할 수 없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지금 한국의 대통령이 이전의 인물들에 비해 권력중심적이며 권력을 소유하고 행사하는 데 강한 욕망을 드러낸다고 하여도 그의 말 한마디로 모든 국민이 복종하진 않는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국민은 자신의 권리를 일부 희생하여 그 권리를 집행할 권리를 대통령과 같은 주권자에게 부여했지만 이는 한시적이며 만약 주권자가 권력의 유한한 양도를 망각한다고 여겨질 경우, 즉 자기 보존의 권리가 훼손된다고 여겨질 경우 국민은 주권자를 주권자로 인정하지 않고 그 지위에서 내려올 것을 요구한다. 2016년 겨울 광화문 대로를 가득 메운 인파 속에서 우리는 그 요구가 무엇인지를 함께 경험했다.


그러나 나는 앞서 이야기 한 홉스의 정치 사상 중에서 두 번째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되는 것이었다. 모두가 자기 보존을 위해 자발적으로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주권자에게 양도하고 주권자는 구성원의 생존을 위해 막대한 권리를 부여받아 이를 행사하는 것, 주권자가 국민 위에 군림하며 커먼웰스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제한없이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 어쩌면 그것은 내가 15년 동안 재직하며 경험한 한국의 대기업의 모습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재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이제는 구시대의 풍습 같아보이지만  내가 다니는 기업을 포함해서 확실히 한국의 대기업은 오너 일가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다. 


오너와 이들의 대리인인 CEO는 결코 악하거나 무능하지 않다. 이들은 남들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우수한 교육을 받았고 경영, 정치, 사회 다방면으로 저명한 인사와 끊임없이 교류하며 시야를 넓히고 자신 또는 자신의 부모세대가 일으켜 세운 기업이기에 일반 직원보다도 회사에 더 애정을 가질 수 밖에 없다. 홉스가 ’군주는 공익과 사익이 일치하기 때문에 커먼웰스의 생존과 번영을 자연스럽게 추구할 수 밖에 없다.’ 이야기한것처럼 기업에 남들과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오너와 그들의 대리인은 기업에 대해 누구보다 더 고민하고 각별한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와 능력을 바탕으로 많은 분야에 걸쳐 강력한 권력을 사용한다. 새로운 사업 분야에 진출하여 비즈니스 포트폴리오를 변경하고, 이를 위해 사용 가능한 리소스를 어디에 집중할 것인지 결정하고, 직원들이 일하는 방식에 개입하고, 심지어 회사 내에서 사용되는 주요 프레임과 개념까지 손쉽게 창조하고 폐기한다. 특히 새로 권력을 잡은 주권자의 경우 마지막의 영역 - 개념의 생성과 폐기에 대해 관심이 많다. 


새로운 주권자들은 과거와 비교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은 오늘을 과거와 크게 다른 개념으로 해석하려고 하고, 그 개념으로 경영 활동을 하기 위해 자신의 권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주권자의 마음이 바뀌거나 그들의 대리인인 CEO가 교체될 경우 이전의 개념은 폐기되고 새로운 개념이 등장한다. 그러한 역사가 계속 반복된다. 그러나 그들의 선한 의지, 유능한 역량이 기업이라는 커먼웰스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새롭게 진출한 비즈니스 영역에서 부진을 면치 못할때도 있고 주권자 개인의 일이 회사의 공적인 일과 겹쳐 회사 성장을 저해하는 경우도 많다. 또한 주권자인 기업의 오너와 CEO에게 자신의 자유 일부를 양도한 구성원이 일하는 방식과 형태를 과거지향적으로 후퇴시키는 경우도 많다. 주로 회사 경영이 어려워질 때 Sense of urgency라는 단어와 함께 유연한 근무를 방만한 근무로 부르며 이를 공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나는 그러한 양태를 15년 간 지켜봐왔다. 주권자들은 계속 권력을 행사하고 개념을 생성하고 다시 폐기하고 수없는 판단 오류로 회사 손해를 야기하고 ……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 커먼웰스의 인민에 해당하는 직원들, 구성원들의 반응 양식이다. 나를 포함한 구성원들은 주권자의 권력 의지와 그 행사에 대해, 그리고 권력 행사에 따른 경영손실과 나의 생존의 위협 상황에 크게 반응하지 않는다. 회사 경영인들과 협상하고 투쟁하는 것은 공장의 노동조합이 할 일이라고 생각하며 부조리에 저항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노동조합의 존재는 매년 성과급 책장과 연봉 인상 시기에 나 대신 회사와 협상을 하는 대리인 정도로 여기기 마련이다. 분명 구성원과 회사는 계약에 의해 서로 구속되어 있으나 매 년 초 연봉계약서를 일방적으로 제공받는 입장에서 구성원에게 계약이라는 단어는 몹시 낯설다. 구성원은 매우 수동적이다. 우리는 블라인드라는 백도어를 통해 익명의 이름으로 회사의 경영방향과 주권자의 권력 행사를 비판하는 것에 만족했고 주권자의 잘못된 판단과 행동에 저항하지 않고 회사를 떠나 더 낫다고 생각하는 회사로 이직하는 것을 선호했다. 우리는, 우리가 다니던 회사에 저항하거나 바꾸려하지 않았고 우리가 앞으로 다닐 회사 자체를 바꾸는 것에 만족했다.


내가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다른 인간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늑대라는 점을 일깨운 것도 아니고, 양도된 권력을 한 명의 주권자에게 집중시키는 군주정을 주장한 점도 아니며, 바로 인민은 자신의 보존을 위해 자발적으로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주권자에게 양도했으되 주권자가 만약 이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하고 그릇된 결과만을 낳는다면 권리의 양도를 거두어들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홉스의 <리바이어던> 해설의 이런 대목을 되새겨 볼 만하다. “홉스는 절대 권력을 강조했지만 그 권력이 개인의 생명을 해칠 경우에는 저항하거나 권력을 속이거나 피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국가라는 리바이어던 역시 개인들의 계약을 통해 세워진, 즉 국민의 목숨을 안전하게 지키고 보장하기 위해 마련된 도구에 불과하다”. 여기서 국가를 기업으로, 국민을 기업의 구성원으로 바꿔 읽어도 의미는 변하지 않을 거다. 주권자인 오너와 CEO에게 내가 일하는 것과 관련된 권력을 양도하는 것은 좋다. 나는 그들에게 선한 의지와 유능한 역량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이 나의 생존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판단될 때는 권력 양도의 계약을 파기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에서 늑대로 돌아가야 할 때는 그래야 하는 것이다……


인간에서 늑대로 돌아가야 할 때 돌아가는 법을 잊어버린 늑대는 길들여진 늑대와는 다른 존재다. 그건 늑대로서의 본성이 제거된, 거세된 늑대에 가깝다. 자기 보존의 본성을 거세당한 늑대는 자신의 권리를 주권자에게 양도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인간의 탈을 쓰고 인간의 시민법을 준수했는지 여부만을 신경쓰게 된다. 내가 양도한 권리가 나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주권자가 지배하는 커먼웰스의 시민법 테두리 안에서 내가 머무르는지 여부만을 따진다. 어떻게 생각하면 법과 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고 마이크가 꺼져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국회의원은 늑대의 본성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갖고있는 셈이다. 기업에 다니는 구성원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새로운 비즈니스에 진입하는 것이 공동체를 위해 옳은 것인지, 기존 사업을 매각하는 것이 공동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아닌지를 따질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주권자의 결정에 순응하고 침묵한다. 우리는 기업에 오래 다니는 것이 우리의 생존이라고 믿는다. 기업을 떠난 자신은 더 이상 보존되지 않는 것이라고, 회사원이 아닌 자신의 모습은 쉽게 상상하지 못하며 하루하루를 견뎌낸다. 나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캐나다의 높은 산맥과 좁은 협곡과 너른 초원을 보며 이러한 자연에 내던져진 인간은 서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공포스러운 투쟁을 지속해야 할까, 그런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고보니 자기 보존을 위해 기꺼이 기업이든 국가든 커먼웰스에 나의 권리를 양도하겠다는 마음가짐과, 커먼웰스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겠다는 마음가짐은 서로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만약 거세된 늑대라면,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커먼웰스를 영원불멸한 것으로 생각하며 그 속의 시민법을 준수하는 것에 안주한다면, 만약 그렇다면 오늘 날의 커먼웰스의 주권자는 과거 왕조시대의 군주가 아니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를 떠올리며 우리는 민주주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스스로 위로한들 그게 무슨 의미일까. 나는 높은 연봉이 보장된 대기업의, 정년이 보장된 공무원 조직의 한 구성원이라고 스스로 위로한들 그게 무슨 의미일까. 


안락한 거세된 늑대보다는 황야의 이리가 되어보겠다는 그 생각. 그 생각조차 나는 아직까지 감히 가져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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