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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siness Strategy. 합과창상

인문학으로 MBA하다 (7)

by 피터 화엉
인문학으로 MBA하다 (7)
Business Strategy. 합과창상
2023 Fall - Mod 2
#전략, #심리, #조나선하이트, 바른마음, #직관과추론



기대가 커서 실망도 큰 법이었을까? 슈퍼맨, 정확히는 슈퍼맨으로 변신하기 전 안경을 낀 클라크 켄트가 연상되는 팀 오트 교수가 가르치는 Business Strategy(경영전략) 수업은 아쉽게도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건 이 과목을 가르치는 팀 교수 때문도 아니고, 내가 학부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스물 여섯 살부터 15년 가깝게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가장 많이 담당했던 일이 전략 또는 기획 관련 업무여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전략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전략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학부 때부터 경영전략 과목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 중 하나였다. 경영전략은 마케팅, 생산관리, 재무관리 등 다른 영역을 모두 공부하고 난 다음에 이를 바탕으로 기업의 방향을 결정하는 종합학문이라는 학교 측의 판단 때문이었는지 보통 경영전략은 대학교 4학년에 듣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나도 졸업을 앞둔 대학 4학년 때, 세련된 외모와 카리스마 넘치는 강의 태도로 학생들에게 큰 인기가 높았던 김언수 교수에게서 경영전략 과목을 배웠는데 지금 돌이켜봐도 대학 생활 중 기억나는 몇 안되는 수업 중 하나다.


스물 다섯 살 때 경영전략 수업을 들으며 내가 생각한 전략이라는 건, 우리가 더 나은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프레임을 제공하는 영역이라는 점이었다. 사업이 성숙한 정도에 따라 내가 지금 산업 내에서 어느 단계에 위치해 있는지, 나의 경쟁자는 누구이며 어떤 강점을 지니고 있는지, 내가 생각하는 고객은 정확히 누구인지 등 내가 위치한 소위 로케이션을 입체적으로 돌아보는 여러 경영 프레임을 배우는 것은 몹시 즐거웠고, 그 프레임을 다양한 사례에 적용해서 여러 기업이 올바른 의사결정을 내렸는지, 더 나은 의사결정을 내릴 수 없었는지 이성적으로 분석하는 것 역시 몹시 즐거웠다. 또 나처럼 공인회계사 준비를 하지 않는 학생들은 적어도 한 번 정도는 졸업 후 진로로 컨설턴트를 꿈꾸기 때문에 맥킨지나 BCC가 만든 전략 보고서를 구해 읽어보며, ‘아 이런 것이 전략이구나…’ 라고 생각하곤 했다. 필드에 나아가기 전, 우리들에게 전략은 곧 컨설팅 펌의 보고서, 그 보고서에 담긴 분석 프레임워크를 의미했다.


그런데 MBA에서 다시 경영전략 과목을 들어보니 20년 전 우리가 수업에서 배우고, 컨설팅 펌 보고서에서 보았던 경영 프레임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던 것이다.


여전히 우리는 마이클 포터가 1979년 제안한 Five Forces model of competition을 통해 기업을 둘러싼 주체들 - 공급자, 구매자, 대체재, 잠재적 시장 진입자의 경쟁력 정도를 측정해서 현재 내가 처한 경쟁의 강도를 파악하는 법을 배웠고, 내가 가격에 강점이 있으면 낮은 가격을 유지하는 Cost Advantage 전략을, 내가 특별한 제품이나 서비스를 생산할 재능이 있으면 Differentiation 전략을 사용하라는 점을 배웠다. 기업이 보유한 자원과 역량을 진단하는 VRIN (Valuable, Rare, Inimitable, Non-substitutable) 프레임워크는 학부 때는 배우지 않은 개념이었지만, 현상을 진단한다는 측면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수업 시간 내내 어떤 기업에 대한 비즈니스 케이스를 읽은 뒤, 이 기업이 Five Forces model of competition에 비추어봤을 때 높은 경쟁 상황에 처해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각 박스에 High, Medium, Low를 채워넣고 서로 토론하는 연습을 했다. 학생들끼리 갑론을박하며 기업의 경쟁도를 측정하고 나면, 이 기업이 합리적으로 추진해야 할 전략을 자연스럽게 추론할 수 있게 된다. 다섯 개 박스 중에 네 개는 Low고 하나만 High라면 우선 전체적인 상황은 나쁘지 않지만, High에 해당하는 플레이어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또는 모든 박스가 다 High 또는 Medium 일 경우에 그 경쟁판도에서 아예 나와서 다른 게임을 하거나 그나마 가장 약한 플레이어 대비 경쟁우위를 차지해야 한다는 식으로 우리는 칠판에 그려진 경쟁 도식을 보며 합리적으로 추론하는 법을 배웠다.


20년 전 학부 때나 MBA 수업에서나 경영전략은 기업이 지금 처한 상황이 어떠하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현실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미래를 추론하는 이성의 영역이었다.


학부에서 경영전략을 수업을 듣던 2009년 가을 어느 날, 학교에서 Business Case Competition이 열린 적이 있었다. 네 명이 한 조를 이뤄 하루 종일 기업의 전략을 수립해야 하는 대회다. 오전 일찍 대회 주최 측에서, 어떤 기업이 처한 경영상황과 핵심 문제, 그리고 핵심 재무 정보를 제공하면 하루 종일 같은 조원들과 이 기업이 추진해야 할 전략 방향을 고안하고 당일 저녁에 이를 심사위원들 앞에서 영어로 발표하는 일정이다. 대회 문제는 미리 주어지지 않고, 학생들은 약 10시간 내에 문제 이해부터 전략방향을 수립하는 것까지 모두 끝마쳐야 한다. 이 대회에서 이긴 그룹은 학교를 대표해서 서울 지역의 대학 전체가 참가하는 큰 규모의 Business Case Competition에 참가할 수 있게 된다.


학생들은 경영전략 수업에서 배운 프레임, 이론, 개념을 모두 동원하여 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Bottom-up 방식으로 분석하고 추론한다. 합리적 추론 과정에 감정적이거나 직관적인 것은 좀처럼 개입되지 않는다. 하루 종일 케이스를 풀고 난 이후 약간의 자신감과 더 많은 두려움이 섞인 채 심사위원 앞에서 20분 발표하고 나면 심사위원의 질문이 약 30분 정도 이어진다. 심사위원이 “왜 그 전략을 추진해야 하죠?” 라고 물어봤을 때 “그냥… 하고 싶어서요.” 라고 말하는 학생은 아무도 없다.


“이런저런 정보를 종합적으로 분석해보니”,

“이러저런 프레임을 적용해서 이 기업이 처한 로케이션을 진단해보니”,

“이런저런 재무지표를 진단해보니”


라는 식으로 합리적인 틀로 현실을 도해하고 분석해서 추론한 결과를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설명이 합리적일 때 우리는 전략에 당위성과 중요성을 부과하곤 한다. 대학에서 배우는 경영전략은 우리가 더 나은 의사결정을 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냉정하게 현실을 분석하는 추론 능력임을 의미했다.

그런데 과연 현실도 그랬을까.


2010년에 신입사원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한 뒤, 기업에서 15년 가까이 경영전략을 수립하거나 또는 전략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실행계획을 기획하는 업무를 꽤 오래하다 보니 나름의 경험적인 신념 같은 것이 생겼다. 기업도 사람이 다니는 곳이고, 의사결정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꽤 직관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릴 때가 많다는 것을 종종 목격했다. 직관적인 의사결정의 승률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 정량적으로 진단하기란 어렵지만, 새로운 사업을 개발하거나 경영위기 상황에서 플랜B를 수립할 때 기업이 처한 상황을 낱낱이 분석하고 이성적으로만 추론하는 경우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서 잠깐, 직관적인 의사결정이라는 건 아무 근거도 없이 경험과 감에만 의존하는 그런 의사결정은 아니었다. 자수성가형 CEO가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단독으로 자신의 감만 믿고 이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선언하면 모두가 의심없이 그 방향으로 우루루 가는 것이 직관적인 의사결정의 모습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리더가 모두의 의견을 경청한 뒤, ‘잘은 모르겠지만…’ 이라거나, ‘100%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라고 운을 떼면서 일단 한 번 이렇게 해보자고 직관적인 가설을 제시하면, 집단지성의 힘을 빌려 그 가설대로 움직여도 되는지 한 걸음 뒤에서 근거를 찾아보는 경우가 많았다. 보통 기업의 중요한 의사결정은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고 여러 번의 보고를 통해 심사숙고한다. 그렇기 때문에 몇 주 뒤 다시 모여 최종적으로 전략을 결정하였는데 그때도 결국 마지막 도장을 찍는 것은 추론보다는 직관이었다. 모두가 드러내놓고 말을 하진 않지만, 이것을 ‘하고 싶다.’ 또는 ‘해야 할 것 같다.’ 라고 되뇌이는 가운데 전략은 성립된다.


경험적 직관과 합리적 추론은 늘 함께 움직이지만, 의사결정의 시작도 그리고 의사결정의 끝도 보통은 직관적 판단이 담당하는 것, 그것이 내가 15년 가까이 전략이라는 화두에 대해 목격한 바였다.그리고 직관과 추론에 대한 화두를 단순히 목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만의 일종의 가치관이 되었던 경험을 하게 된다.


직장생활이 5년 차에 접어들어, 어느 정도는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배울 것이 많은 대리 시절, 나는 몇 명의 어떤 작은 TF에 3년 정도 소속되었던 적이 있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에너지 산업에 속해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중동 국가에서 원유를 수입해서 울산에 있는 공장에서 이를 끓여 정제하면 휘발유, 경유, 등유와 같은 기름이 생산되고 이를 국내 주유소에서 팔거나 해외로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 회사 입장에서는 중동에서 구매하는 원유의 가격, 즉 국제유가가 회사 손익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핵심 지표였고 유가 변동을 늘 주의깊게 모니터링 했다. 국제유가가 너무 올라도 문제지만 또 단기간 내에 갑자기 유가가 하락하는 것도 그 나름대로 손익 관점에서 큰 문제였다. 그래서 이 국제유가의 변동을 어떻게 잘 예측하고 대응할지가 언제나 큰 고민거리였는데, 2014년 하반기 내내 국제유가가 속절없이 하락해서 회사가 크게 손실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회사는 국제 유가에 대해 뭐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미래 유가를 예측하는 조직을 신설해 운영하기로 했다. 2015년 1월, 임원 한 명과 나를 포함해서 일반 직원 네 명, 총 다섯 명의 조촐한 규모로 유가 전망 조직이 만들어졌다. 유가 전망 조직의 미션은 심플했다. <다음 달 유가의 방향과 수준을 전망한다.> 처음에는 이 미션을 받아들고 무척 황당하기만 했다. 딸이 즐겨 먹는 계란의 가격을 예로 들어보자. 딸은 구운 계란을 무척 좋아해서 우리집은 늘 계란을 많이 사두곤 했는데, 조류독감으로 계란 가격이 폭등하는 시기에 계란을 사는 것은 좀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만약 딸이 ‘다음 주 계란 가격이 한 판에 5,000원에서 7,000원으로 급등할 겁니다’, 혹은 ‘2,000원으로 급락할 겁니다.’ 라는 전망을 우리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 다소 황당하게 들리지 않겠는가?


미래를 전망하는 것은 제3자 관점에서는 무척 매혹적이지만, 막상 내가 해야하는 일이 되면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 구름과도 같은 느낌이다. 우리는 그 구름을 잡아야 했다. 그것도 매 달마다, 다음 달의 구름의 방향과 크기를.


처음에는 어떤 방향으로 일을 해야 할 지 우왕좌왕했지만 조금씩 업무 프로세스가 구체화되었고 유가 전망 조직 나름대로의 전망 작업의 체계도 잡히기 시작했다. 매달 중순이 되면 유가 전망 조직 다섯 명이 모여 다음 달 유가가 어떻게 될 것인지 논의를 시작한다. 시장의 다양한 지표를 검토하고, 금융시장의 현재 투자심리를 점검하고, 유가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치는 주요 국가의 정치적 이벤트를 살펴본다. 중동 산유국이 모여 앞으로의 원유 생산량 수준을 논의하는 OPEC 회의가 열릴 때면 밤늦게까지 회사에 남아 OPEC 회의 결과를 실시간으로 지켜보기도 했다. 이 작업은 꽤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뇌 활용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자료 검토 끝에 우리가 내리는 초기 가설은 상당히 직관적인 과정을 통해 정리된다.


유가 전망 조직을 이끌던 임원은 항상 <합과창상>을 강조했다. 합과창상은 <합리적 과단성과 창의적 상상력>을 의미한다. 시장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를 충분히 검토하되 그 자료에 기초해서 미래를 내다보지 말고, 과연 앞으로 무슨 일이 발생할 것인지 과감하고 창의적으로 그리고 직관적으로 미래를 상상해보자는 것이었다. 최종 의사결정을 내리던 임원은, “현상 자료만 분석하고 숫자만 이성적으로 검토해서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우선 시장에는 너무나 많은 정보가 흘러다니고 있어서 그 정보들을 다 확인할 수도 없고, 무엇보다 국제유가가 앞으로 오를 것인지 또는 내릴 것인지를 의미하는 정보가 모두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A 뉴스를 보고 앞으로 유가가 오를 것이라고 판단해서 금융시장에서 유가가 오른다고 베팅하지만, 어떤 사람은 똑같은 A 뉴스를 비관적으로 해석해서 유가가 내리는 쪽에 베팅을 한다. 유가가 오른다고 베팅한 사람이 더 많으면 국제유가는 오르고, 내린다고 보는 사람이 더 많으면 유가는 내린다. 기술적 분석을 통해 미래 변화를 예측하는 사람도 분명 있지만, 대부분의 의사결정은 그보다 앞서 순식간에 그리고 거의 본능적으로 이루어진다.


주식시장의 변동과 비슷하다. 의사결정을 하는 수 많은 플레이어들은 결국은 자신의 직관에 따라 게임에 참가하는 법이고, 미래를 전망해야 하는 우리 역시 직관적으로 그들의 직관을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집단지성의 직관에 기대 초기 가설을 세우고 난 뒤, 월말이 될 때까지 우리는 각기 흩어져 또 열심히 시장정보를 수집하고 이성적으로 분석한다. 그리고 월말이 되면 다시 모여 최종 의사결정을 내린다. 우리가 2주 전에 수립했던 시장 가설이 여전히 유효한지, 가설을 뒤집을만한 정보들이 축적된 것은 없는지를 점검하고 미래 유가에 대한 전망을 최종적으로, 그리고 직관적으로 결정한다. 다음 달 유가는…… 이번 달보다 배럴 당 3불 내릴 것이다! 직관이 유가 전망의 시작과 끝을 결정했다. 추론은 직관과 직관 사이에 존재했다.


미래 유가 전망 승률은 나쁘지 않았다. 1년에 열 두 번 다음 달 유가를 전망하게 되는데 어느 시점에는 전망이 맞은 확률이 75% 가까이 이어진 적도 있었다. 방향과 함께 변화의 폭도 전망에 부합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음 달 유가가 배럴 당 3불 내릴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실제 배럴 당 2.8불 하락했던 달에는 짜릿함마저 느껴졌다. 내가 소속된 집단이 미래를 잘 예측하고 회사 전체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는 것은 개인적으로 기쁜 일이었지만, 정작 내가 흥미롭게 배운 점은, 결국 의사결정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기술적 분석이 이를 완전히 대체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사람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추론만 하는 기계가 아니었다.


그 당시에는 미처 몰랐지만, 결국 회사의 전략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배운 셈이었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 혹은 회사의 경영전략을 고민하는 것 모두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의사결정은 직관적인 판단과 합리적인 추론을 모두 필요로 하며, 결국 시작과 끝은 직관적인 판단이 차지하고 합리적 추론은 그런 직관적 판단을 뒤늦게 따라오곤 했다. 이건 우리가 경영전략 수업에서 배우지 못했던 현실의 전략이기도 했다.


내가 현장에서 경험했던 도덕적 판단과 합리적 추론의 관계는, 조너선 하이트 뉴욕대 스턴 경영대학원 교수가 2012년 펴낸 <바른 마음 (The Righteous Mind)> 책에서 언급한 내용과 거의 일치했다.


심리학자인 조너선 하이트 교수는 특이하게 심리학과가 아니라 경영대학에 소속되어 기업의 윤리적 의사결정, 도덕적 자본주의에 대해 가르치는데, 그는 인간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생각에 의문을 갖는다. 그가 생각하는 도덕심리학의 원칙은 “직관이 먼저이고, 전략적 추론은 그 다음이다” 라는 것이다. 도덕적 직관은 자동적으로 그리고 거의 순식간에 일어나며 이 도덕적 직관에 따라 도덕적 추론이 이루어지고 이 도덕적 추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후적으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추론이 뒤따라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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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하이트 교수는 이를 코끼리와 기수에 비유한다. 도덕적 판단과 합리적 추론 둘로 나뉜 마음은 코끼리 위에 기수가 올라탄 모습이고, 기수의 역할은 코끼리의 시중을 드는 데 있다. 여기서 기수는 우리의 의식이 합리적으로 상황을 이해하고 추론하려는 과정을 말하고, 코끼리는 나머지 99퍼센트의 직관적인 판단 과정을 의미한다.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가야 할 때 코끼리(직관적 판단)는 기수(합리적 추론)에게 어디로 갈까요? 라고 물어보고 움직이지 않는다. 코끼리는 그냥 자신이 가고 싶은 방향으로 큰 몸을 움직이며 길을 떠난다. 기수는 거대한 코끼리를 조종할 수 없기 때문에 코끼리가 방향을 정하고 움직이고 나면 최대한 그 길을 안전하고 위험하지 않게 코끼리에게 신호를 전달할 뿐이다. 우리 머릿속에서는 직관적 판단이 먼저 일어나고, 그런 다음에 천천히 합리적 추론을 통해 그 판단을 정당화하는 여러 이유를 이리저리 긁어모으게 된다.


조너선 교수는 <바른 마음>에서 이렇게 말한다. “직관은 추론을 일으키는 추동력이지만, 추론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기수(추론)는 코끼리의 본심을 반드시 다 알 필요는 없다. 코끼리가 방금 무슨 일을 저질렀든 기수는 그것을 사후 조작하듯 설명하는 기술이 뛰어나고, 코끼리가 앞으로 하고 싶어 하는 일에 대해서도 그 정당화의 근거를 잘 마련한다.” 코끼리(직관)와 기수(추론)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도화선이 되는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직관적으로 이 길이야! 라고 외치며 먼저 움직이지만, 왜 이 길인지, 이 길을 좀 더 잘 걸어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뒤늦게나마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서다. 우리의 더 나은 의사결정은 먼저 움직인 직관과 뒤따라오는 추론의 유기적인 연결에 달려 있다.


생각해보면 전략이라는 단어는 꼭 마법의 언어처럼 여기저기 다른 단어와 조합되어 자주 사용되곤 한다.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전략적으로 행동하고, 전략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CEO를 포함해 모든 회사원에게 요구되는 필수 덕목처럼 여겨진다. 이때 전략적이라는 단어는 언어, 논리, 분석, 이성 등을 담당하는 좌뇌와 연결되어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냉정’하고, ‘객관적’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그에 비해 직관적이라는 단어는 적어도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다분히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직관적이라는 단어는, ‘자기의 얇은 경험에 기대어’, ‘재무정보도 들여다보지 않고 감에 의지해 독단적인’, ‘뚜렷한 근거가 없는’, ‘경영인으로서 자질이 부족한’, 이런 뉘앙스로 받아들여진다. 물론 직관적인 판단만을 갖고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란 쉽지 않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추론과 근거를 제시해야 모두가 공평하게 토의할 수 있는 운동장에 모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합리적 추론만으로 타인을 설득하고 의사결정을 내릴 수는 없는 법이다. 조너선 하이트 교수는 “우리는 직관적으로 먼저 의사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타인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직관에 호소해야 한다.” 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올바른 전략은 숫자에 근거한 설득보다는, 틀을 깨는 상상력을 통해 타인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감화(感化)에 더 가깝다.


지난 20년을 돌아보면 전략에 대한 나의 생각은 끊임없이 바뀌어왔다.


처음에 나는 맥킨지나 BCC와 같은 컨설팅 펌에서 만드는 전략 보고서가 곧 전략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보고서에서 사용하는 프레임워크, 구조화된 레이아웃, 전문 경영 용어들이 전략이며 컨설팅 펌처럼 보고서를 만들면 나도 전략을 잘 수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전략 컨설팅 펌이 제시하는 다양한 개념과 프레임워크는 무용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들은 우리가 처한 상황을 체계적이고 구조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이를 바탕으로 문제가 무엇인지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준다. 소위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전략을 수립해야 할 때, 컨설팅 펌의 접근 방법은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슬프게도, 내가 처음에 가졌던 통념 - 즉, 컨설팅 펌의 전략 보고서가 곧 전략이라고 생각하는 통념은 여전히 조직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회사에서 전략 부서는 보고서를 만드는 조직이고 보고서를 컨설팅 펌처럼 잘 만들어야 전략 부서에서 일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여전히 존재한다. 나도 어느 시점까지는 그런 믿음에 사로잡혀 있던 적이 있었다. 전략기획 부서에서 일을 할 때 직속 리더가 여러 의견을 내면 그것을 여러 프레임워크를 사용해서 구조화하고 이를 보고서의 형태로 정리하는 것을 비교적 손쉽게 했기 때문에, 나는 내가 전략적으로 감각이 있다고 착각했다. 그러나 내가 했던 것은 전략이 아니라 분석이었고, 의사결정이 아니라 의사결정에 필요한 배경정리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유가 전망 조직에서 다섯 명이 다함께 의사결정을 하는 과정을 경험하면서, 직관이 의사결정에 개입하는 순간을 충격적이지만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직관이 추론에 선행한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추론은 현실을 구조적으로 들여다보는 데 도움이 되지만 그것만으로는 다음에 어디로 갈 것인지? 전략을 만들어낼 수 없다. 전략은 사람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다음 발걸음을 옮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고, 사람은 그 판단을 결국 직관적으로 해내는 법이다. 타인이라는 거대한 코끼리들이 발 소리를 쿵쿵 울리며 돌아다니는 현장에서, 우리는 나도 모르게 본능적이고 직관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그들 사이로 걸어간다. 내 등에 올라탄 기수와 함께 말이다. 우리는 믿는 방향대로 살아가며, 그렇기 때문에 성공이든 실패든 믿는 방향대로 삶이 이루어진다.


합리적 과단성과 창의적 상상력. 합과창상을 가르쳐 주셨던, 그 임원은 결국 나중에 회사 CEO까지 역임하시고 35년 넘는 직장생활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셨다. 전략기획 관련 업무를 담당하며 적지 않은 C-Level을 만나보았지만, 유가 전망 조직에서 만났던 임원만큼 직관적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그걸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그럴법한 스토리라인으로 풀어내는 것을 강조하신 리더는 없었던 것 같다. 학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던 임원은 특별히 자신의 감을 과시하거나 과신하지도 않았고 늘 데이터를 중요하게 여겼지만, 그럼에도 미래를 직관적으로 내다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대부분의 사람이 자기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강조하고 숫자 중심으로 비즈니스를 이해할 때 직관의 언어로 전략을 만들어가는 분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INFJ인 나는 꽤 안도가 된다. 돌이켜보면 대학을 졸업하며 합격한 여러 회사 중에서 지금의 회사를 선택할 때, 회사 내에서 조직 간 이동을 할 때, MBA를 준비하며 합격한 여러 학교 중에 지금 다니는 학교를 선택할 때, 나는 언제나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으니까…” 라고 말하며 직관적으로 나의 다음 발걸음을 선택하곤 했다. 그게 성공인지 실패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직관의 힘이라는 것이 그리 무용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 그런 걸 팀 교수의 경영전략 수업을 들으며 종종 떠올리곤 했다. 수업 시간에 딴 생각을 많이 했다는 뜻이다…


2025.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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