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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퀘벤하운 Oct 14. 2016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

얼마 전 개발도상국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뭐 강의라 하기엔 좀 그렇고, 한국의 건설현장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고냥 기술직 중에 영어로 PT 할 만한 사람이 부족해 억지로 끌려간 자리였다. 억지로 끌려간 만큼 정해진 PT를 마치고 의례적인 Q&A 시간이 되었는데, 이 공무원분들이 갑자기 경쟁적으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기술직이 아닌 이 공무원 분들은 터널공법에 대해 집중적으로 질문하기 시작했고, 나는 최대한 쉽게 NATM과 TBM 공법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해당 공법에 대한 글은 댓글에 참조) 열심히 설명하긴 했지만 청중들의 눈빛이 아직도 모르겠단 눈치여서, 그저 난 "여러분 나라에 터널 많지요? 고냥 그거 거진 다 NATM으로 빵빵 터뜨리며 뚫은 거라고 보시면 돼요."라고 말해줬다. 사실 터널 굴착 방법은 각기 장단점이 있지만, 기계로 터널을 굴착하는 TBM의 경우, 선진국이 아니라면 비용 및 유지보수 관점에서 부담스러워 적용하지 않는 편이긴 했다.


PT가 끝나고 현장답사를 하려 버스를 기다리는데, 남미의 어느 공무원이 잠시 내 옆으로 와서 말을 걸어오더라. 강의 인상 깊게 잘 들었다고, 그러고는 하시는 말씀이 "아까 NATM이란 공법이 여러분 나라의 대부분 터널에 쓰였다고 했는데, 우리나라엔 터널이란 구조물 자체가 거의 없어 무슨 말인지 더 이해 안 되었습니다. 언젠가 우리나라도 경제발전을 해서 터널을 많이 짓게 되면 꼭 연락하겠습니다."였다. 듣고 보니 내가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 위주로 생각하다 보니 조금은 일방적인 설명이 아니었나 싶었다. 돌이켜보니 문득 국민소득 1만 불 이하의 나라에서는 한국에 그 흔한 사장교나 현수교를 본 기억도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따지고 보면 태백산맥 밑을 관통하는 약 10km의 인제터널은 시공비만 5천억 원이 넘는다. 5천억 원이면 대략 4.5억 불인데, 이쯤 되면 개발도상국 입장에선 재정사업으로 진행하기엔 좀 무리다. (개발도상국의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는 대부분 MDB나 각국 차관공사가 주를 이룬다)


언젠가 아프리카 지역 출장을 준비하다 800km가량 거리를 답사할 일이 있었다. 구글맵으로 검색을 하고 대략 서울-부산 두배 거리니까 밟아서 여덟 시간 정도면 충분하겠지 하고 길을 나섰다. 초반 몇백 킬로미터는 그럭저럭 잘 갔지만, 어느 순간부터 비포장도로가 나오기 시작하니 시속 30-40km 이상을 못 가더라. 급기야 산 넘고 물 건너가는 지역까지 있다 보니 최종 소요시간은 열네 시간이 넘게 걸려 밤늦게 숙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지도에선 다 같은 도로라 하여도 도로의 표면상태에 따라 얼마든지 시간은 변할 수 있다는 상대성원리를 몸소 깨달은 사례다. 그런가 하면 또 얼마 전 목포로 출장 갈 일이 있었는데, ktx를 타니 두 시간 반이면 도착하더라. 문득 90년대 초 서해안 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 명절날 인천에서 목포까지 차를 타고 가는데 20시간이 넘게 걸린 기억이 난다. 새삼 인프라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지점이다.


이처럼 우리는 이미 만들어 놓은 인프라 위에 생활하고 있다. 눈에 잘 보이진 않지만, 이러한 인프라가 있기에 기업들은 수출을 할 수 있고, 물류는 하루 만에 전국에 도착할 수 있고, 차도 위에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게 된다. 수도권 전철 및 외곽순환도로 체계가 갖추어지지 않았다면, 지금쯤 경기도에 거주하는 인구는 다 같이 서울에 거주하여 집값은 홍콩이나 싱가포르 수준으로 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 비싸진 집값에서도 10평도 안 되는 집에 거주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일산이니 분당이니, 판교니 평촌이니, 다 교통인프라의 발달이 있었으니 가능한 대규모 주택단지이다. 인프라가 잘 갖추어진 한국은 도서산간 지방에 살더라도 특별히 도시에 비해 부족한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고, 여수에서 잡은 생선도 반나절이면 서울 어느 식당 테이블 위에 올려지게 된다. 그뿐인가. 인천공항의 출현으로 인해 김포공항은 비교적 한산해졌고, 그로 인해 많은 노선이 배정되어 저가항공을 중심으로 저렴한 수준의 여행도 가능하게 되었다. 얼마 전 내가 제주도 갈 때 편도 티켓 값은 무려 2만 원대였다. 앞서 언급한 목포 가는 ktx의 반값 수준이다.


인프라만 그러할까. 대학 등록금이 너무 비싸니 정부에서 지원을 해줘야 한다는 논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업에 종사하는 분들껜 이해가지 않을 수 있는 논리다. 스카이의 기득권을 늘 한탄하며 자신의 학벌을 무시하는 인서울 및 지거국 출신 분들,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무형의 기득권도 이미 어느 정도 있는 것이다. 서울의 전셋값이 비싸다고 이놈의 세상을 한탄만 하시는 분들, 그 세계에 거의 없는 전세라는 제도로 월세 혹은 재산세 등을 낼 필요 없음을 간과하는 것이다.


나도 세상을 살면서 불만이 많고 나보다 더 가진 자들과 비교하며 억울함을 종종 느낀다. 하지만 사회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여사는데, 상대적으로 비교하자면 한도 끝도 없어지게 된다. 부디 내가 가진 보이지 않는(='인식하지 못하는' 혹은 '셀프 평가절하하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지점이다. 물론 이는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에게도 되묻는 지점이기도 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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