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주변에 보면 대학은 돈 낭비다, 어차피 취직하기 위해 스펙 쌓기 용이지 딱히 거기서 배운 건 없지 않냐는 말을 하시는 분들이 계신다. 물론 대학에서 무얼 배웠느냐는 학과에 따라 제각각이라 일반화시키기엔 좀 어려운 감이 있다. 공대를 나온 나는 대학에서 배운 것이 상당히 많다고 생각하지만, 고것도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 나는 물리라는 과목을 좋아했다. 간혹 경시대회도 나간 바는 있었고, 학교에서도 별명이 양물리로 불릴 만큼 물리책도 무던히 많이 봤다.(결코 물리를 잘해서 생긴 별명이 아니고, 물리 책을 많이 봐서 생긴 별명이다 ㅋ) 당연히 대학에 진학할 때도 물리학과를 두 개나 집어넣었으나, 둘 다 떨어지곤 건설도시공학부란 다소 생소한 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사회에 대한 편견과 아집이 가득했던 그 고등학생은 스카이 수준이 아니라면 물리학과에 진학해봤자 밥 먹고 살기 힘들 거란 생각을 잠시 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물론 도시계획이란 게 좀 멋있어 보이고, 평소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라 하니 적성에 맞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도 한몫했다. 그런데 이 건설도시공학부엔 도시과와 토목과가 있는데, 나는 일방적으로 편성된 OT 반편성에 토목과로 분류되어 강원도행 오리엔테이션 버스를 탔다. 토목이라. 거 참 한문으로 쓰자면 유치원생도 쓸 만큼 단순해 보이는 게 土木이었다. 당시 자연과학 외의 공학이나 의학 따위는 과학도 아니란 지극히 자연과학 탈레반이었던 나는 이 토목 따위에 무슨 공학씩이나 필요한지 의문이었다. 그래서 4학년 선배에게 버스에서 물어봤다. "아니 이 버스 타고 다니는 도로를 까는데 무슨 공학씩이나 필요한가요?" 당돌하기도 하고 예의가 무척이나 없는 신입생이었다. 더 기억나는 사실은 당시 4학년 선배는 상대할 가치가 없었는지, 자기도 잘 모르는지 "글쎄"라는 답변만 했다는 것이다. 토목을 15년 하며 밥 벌어먹은 사람 입장에서 그때의 나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다음과 같다.
도로를 깐다는 것은, 먼저 적당한 기울기(보통 10% 이하)를 만들기 위해 산을 깎거나 흙을 쌓는 작업을 해야 한다. 여기서 원지반을 파는 행위가 선결되어야 하는데, 이 원지반은 세계 어느 곳이나 똑같은 지반은 없다는 특징이 있다. 같은 종로라 할 지라도 그랑서울 밑이나 교보빌딩 밑이나 보신각 밑이나 다 다르다. 따라서 어떠한 공사를 시작하기 전엔 이 지반조사를 해야 하는데, 이때 지반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선 지반공학이 들어가야 한다. 지하에는 또 지하수가 존재하여 그 특성을 제대로 목적 구조물 설계에 반영하려면 유체역학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지반의 상태가 좋지 않은 연약지반 구간에는 콘크리트 파일이나 물을 빼내는 공사가 선결되어야 하는데, 여기서 필요한 구조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구조역학적 지식이 필요하다. 여기까지만 언급한 이 지반공학, 유체역학, 구조역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역학이란 기본적인 역학 공부를 해야 하며, 콘크리트나 강재 등의 재료를 공사에 쓰려면 재료역학이라는 과목도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교량공사 등에 쓰이는 풍하중이나 터널공사의 환기시스템을 이해하려면 동역학까지 공부해야 한다. 이러한 모든 역학이란 과목에는 물론 대학 수학과 공업수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수학능력은 기본이라 할 수 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고냥 고 쉬워 보이는 도로를 만들기 위해 땅 한번 파려고 해도 이처럼 수많은 역학적 지식이 필요로 하고, 이는 대학에서 배우지 않는다면 반쪽짜리 엔지니어밖에 될 수 없다. 비록 내가 설계를 하지 않고 시공만 한다 하더라도, 내가 오늘 타설 하는 콘크리트 구조물에 대한 구조계산서나 도면의 이상한 점을 골라내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엔지니어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다. 설령 오늘 친 콘크리트 거푸집을 00일 후에 떼어내라는 감리의 지시가 있는데 이게 적정기간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면 엔지니어는 그에 걸맞은 대응을 해야 한다. 장기간 거푸집 미탈형으로 발생할 균열의 발생 가능성, 매스콘크리트 혹은 일반 콘크리트 구조물이라는 구조적 특성에 따른 거푸집 탈형 시기 상이, 공시체의 시험값을 바탕으로 소요강도의 발현의 충분성을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여기서 그간 배워왔던 구조역학적 지식을 총동원하지 않고 그저 감리의 말이라고 00일 후에 떼어낸다면 쭉쭉 가있는 균열을 어디 가서 하소연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나 같은 경우 대학에서 배운 것들을 사회생활을 하면서 수도 없이 많이 사용한다. 물론 이는 공대라는 특성 때문일 수도 있다. 헌데 요즘 경제학이나 심리학 같은 학문에 대한 책을 읽어보면 확실히 그쪽 전공도 대학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사회에서 적용하는 바가 많은 것 같다. 대학에서 배우는 바가 거의 없다는 논리는 종종 대학 시설투자에 소홀히 해도 된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대학에서 배우는 것이 많다면 응당 그 대학 실험실이나 도서관 등에 투자를 해야겠지만, 고냥 취업을 위한 시간의 관문 정도로 여긴다면 시설투자가 굳이 필요하냐는 것이다. 70-80년대 대학에서 시위하느라 공부할 시간도 없고, 높은 경제성장률에 따른 비교적 쉽게 취업한 분들은 대학에서 배운 게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요즘같이 조금 더 높은 학점을 따기 위해 노력하는 대학생들은 분명 훨씬 많은 것들을 대학에서 배우고 있다. 자신의 경험으로 타인을, 특히 젊은 친구들을 폄하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자신은 대학에서 배우는 게 없었을지 모르지만, 지금도 대학에서 많은 것을 배워나가는 분들은 분명 존재한다.
나는 오늘도 연구실에서,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을 응원한다. 지금 노력하는 그 한시간 한시간은 분명 나중에 사회에서 긴히 잘 쓰일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