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이를 벌써 8년째 키우는 부모다. 주변을 보면 종종 아이에게 원활한 교우관계, 높은 학업성취도, 뛰어난 스포츠 기량을 동시에 요구하는 분들이 보인다. 기본적으로 나는 아이 양육에 대해 타인이 왈가왈부하는 건 온당치 못하단 생각이 있다. 아이와 부모와의 관계, 부모가 살아온 인생, 아이가 생각하는 바 등을 파악하지 못한 채 피상적으로 다른 가족을 재단하는 건 옳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점은 아이는 나의 아바타가 아니라 점이다. 종종 부모들의 욕심을 보면, 내가 어린 시절 공부를 못했거나, 친구들과 원활한 교우 생활을 못했거나, 운동을 잘 못했거나 하는 부분들을 자기 아이에게 채워주기 위해 과도히 교육과 훈육을 통해 강요한다. 자신이 인생을 살아오며 분명 잘한 일도 있을 것이고, 그러한 장점을 아이가 닮은 지점도 있을 것인데, 그런 점들은 쏙 빼놓고 자기가 아쉬운 부분들만 중점적으로 파고들어 아이를 힘들게 한다.
하지만 사자성어인 부전자전이란 말은 과학적으로도 증명되어, DNA로 이루어진 유전자를 통해 부모의 특성은 대개 자녀에게 전이되기 마련이다. 내가 살면서 힘들었던 성격적 결함이나 지적, 신체적 능력은 후천적 노력에 의해 향상되지 않을 수 있으며, 자녀는 대부분 나와 같은 인생을 살아갈 가능성이 농후하다. 나는 육아방법의 과도한 설파나 추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가수 이적의 엄마가 아이 셋을 모두 서울대 보냈다고 화제였던 적이 있는데, 이는 그분이 양육의 달인 이어 그럴 수도 있지만, 그분이 먹고살기도 힘들던 그 시절 서울대 독문 학사란 요인이 지배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 아이의 어려움을 그냥 보고 나와 같이 근근이 버티며 세상을 살아가게 두어야 하는 것인가.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부모-자녀 간의 관계는 무한신뢰의 베이스캠프이다. 자녀는 사회에 나가 필연적으로 갈등을 겪고 능력의 한계를 체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러한 어려움을 가정에 왔을 때는 부모와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생각한다. 부모는 적어도 이 세상에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보호장치라는 개념이 있어 어떠한 고민이라 할지라도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 존재였으면 좋겠다. 그래서 설령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면 아예 이놈의 학교는 답이 없으니 전학을 가야겠다고 하던, 내가 다니는 학원의 숫자는 너무 많으니 이제 좀 줄여야겠다고 협의를 하던, 학교에 가면 나와 놀아주는 애가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상담을 하던, 어찌 됐던 그 어려움을 토로하고 해결책을 같이 찾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도 학교 다닐 때 고민도 많고 열등감도 많았다. 지금 이십 년이 넘은 이 시점이 되면 많이 희석될 줄 알았는데, 아직도 중고등학교를 생각하면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꽤 존재한다. 그러나 지금의 지적능력으로 다시 그 시점으로 돌아간다 한들, 무엇이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은 그다지 하지 않는다. 그 어린 이십 년 전 나도 얼마나 고민을 하고 방법을 모색했는지에 대한 기억도 다행히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때를 되돌아보면, 그래도 대학이란 막연한 미래가 있기에, 엄마는 언제나 나와 나의 능력을 믿어주었기에, 아빠는 네가 수능 같은 거 좀 못 봐도 인생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는 포용력을 보여주었기에 잘 버티었다 생각한다.
부모와 자녀는 유전학적으로 비슷한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기본적으론 미성년자 이후 타인이라 할 수 있다. 무언가 부모 스스로 자녀를 만들어가려고 노력하지 말고 자녀의 나이가 찰수록 점점 조력자의 위치임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행복은 누군가에 대한 복종이 아닌, 자유의지에서 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걸 자녀의 관점에서 항상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