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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퀘벤하운 Oct 24. 2016

자녀와 일기 쓰기

얼마 전 아내에게 특명이 떨어졌다. 평일에 늦게 들어와서 딱히 애들에게 해주는 것도 없는데, 당신 좋아하는 게 글쓰기니까 초1인 큰 아이 일기 쓰는 거나 좀 전담하라고. 일주일에 세 번 쓰면 되니까, 주말에 이틀 쓰고 평일에 하루 일찍 들어오면 된다고. 그리하여 시작했다. 아들과 일기 쓰기.


처음엔 그냥 시키니까. 고냥 저냥 옆에서 봐주기만 하면 되겠지 하고 시작했다. 헌데 같이 일기를 쓰다 보니 꽤나 재미있기 시작하더라. 예컨대 이런 것이다. 엊그제 소풍을 어린이 과학관에 갔는데, 아이는 그 주제로 일기를 쓰고 싶다고. 맞은편 책상에서 인터넷을 하던 나는 아이가 주제를 쓰고 있을 때 그 어린이 과학관 홈페이지에 접속했고, 홈페이지에 나온 내부시설 설명을 보고 있었다. 나는 아이에게 어떤 마을이 가장 재미있었냐고 하니 지구마을이란다. 모르는 체 하고 지구마을에 있는 시설을 내가 열거하니, 아빠 그런 거 어떻게 알았냐고. 갑자기 내 노트북을 보더니 신기해한다. 그리곤 이내 인체마을, 지구마을, 과학마을 등등의 소개를 클릭하며 자기가 본 것에 대해 주구장창 설명하기 시작한다.


문득 어제쯤인가.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시작하니 내 말도 잘 안 듣고, 나완 대화를 하지 않으려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헌데 이렇게 말꼬를 트기 시작하니 아이는 홍수처럼 말문이 트여 나에게 말을 쏟아내고 있는 게 아닌가. 아빠가 맞춤법은 틈틈이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알려주고, 단어의 어원도 한자와 영어를 섞어 알려주니, 얘도 아빠가 좀 쓸모 있는 존재란 것을 슬슬 인식하는 것 같더라.


그러더니 이젠 나도 욕심이 생겨 아이의 문장을 조금 조언하기 시작했다. 내가 글을 쓸 때 생각하는 몇 가지 원칙. 문장을 끊어쳐라, 운율을 느끼게 쓴 문장을 읽어보며 이어 써라, paraphrasing, 즉 가능하면 같은 단어를 반복하지 말고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해라, 수동태가 아닌 능동태를 사용하여 의미하는 바를 가급적 정확히 전달해라, 등등. 처음 몇 번 내가 예시 문장을 불러주니, 이내 아이도 자기 머리를 굴려가며 "이건 어때?"하며 샘솟는 아이디어를 내어 놓는다.


일기 쓰기라는 것은 글 쓰는 습관을 만드는 도구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결국 스스로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헤아리는 힘을 길러준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난 일주일간 어떠한 일을 했고, 복기해 가면서 다음 일주일은 또 어떻게 생활할 것인가도 구상해보며. 이게 아이라면 선생님이나 부모가 검토하는 일기 쓰기일 수 있고, 어른들의 경우 SNS가 될 수도 있고. 물론 자기 혼자 쓰고 비밀일기처럼 혼자 간직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말이다. 글을 쓰며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아이나 어른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며, 어려서부터 그러한 습관이 자리 잡히면 분명 앞으로 자기 생각을 정리하는 데 충분한 도움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제 슬슬 아이가 고학년이 되면 같이 독후감을 써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같은 책을 읽으며 서로 생각한 바를 꺼내어 얘기해보고. 그럴 날이 올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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